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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소금 Jan 09. 2024

눈이 내리네

프롤로그

'영화 읽어 주는 시간' 연재를 끝내기로 했습니다. 연재를 위해서 영화를 최소한 2번을 봐야 하는데 시간 관계 상 어려움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영화 감상문 대신 미친 척하고 소설을 써봤습니다. 픽션이죠. 넌픽션을 가공한 자전적 소설이지만요. 소설을 쓴 이유는 그냥 함 써보고 싶기도 했지만 내용에 대해 누가 물으면 소설이잖아 하면 되니까 훨씬 자유로울 것 같았어요. 퍼헐펄 내리는 눈에 기대어 걍 질러봅니다.


제목은 '눈이 내리네(당신이 가버린 지금) 입니다.



그 해에는 유난히 눈이 잦았다. 12월 중순부터 시작된 눈이었다. 친구들은 펄펄 내리는 눈을 보며 이러다가 정작 크리스마스에는 구경도 못하는 것 아닌가, 내심 불안해 하며 좀 참았다가 크리스마스에 왕창 오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반가움에 앞서 희망사항이 더 컸던 눈이었다고나 할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일을 두고 크리스마스 징크스라고 했던가. 나는 그즈음 남자 친구와 그야말로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온 세상을 뒤덮은 하얀 눈, 며칠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는 기대나 흥겨움은 커녕 괴로움만 고조 시킬 뿐이었다.  검게 탄 숯덩이 같은 내 마음은 세상이 새하예 질수록 더 선명해지고 더 짙어져 갈 뿐이었다.



거리에는 우산을 쓴 사람들이 눈길에 미끄러질까봐 길바닥에 눈을 댄 체 종종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날에 그와 나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쿨하게. 

-잘 가

-안녕

돌아선 길, 우산 속에서 눈:물 같은 눈물이 아니, 그보다 훨씬 진한 눈물이 얼굴을 타고 내렸다. 세상의 온갖 것들이 눈 속에 파묻히고 있었지만 짧은 작별 인사 뒤에 남은 이별의 슬픔은 눈으로 덮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어쩌다가 이 꼴이 되어버렸을까?' 비호감이라 여겼던 신파가 현실이 되어 덮쳐왔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우산을 집어 던지고 대로에서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이대로 끝나다니,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바지 가랑이라도 붙들고 애원해 볼걸. 나는 정말 정말 너를 사랑한다고, 나는 너가 보고 싶어서 죽을 지도 모른다고 솔직히 털어놓았어야 했어, 이 미련을 어찌하나. 그러나 기차는 떠났다.



그에겐 새로운 사랑이 생겼다. 그는 나쁜 놈이다. X자식, 증오만이 나를 추스를 수 있는 유일한 설득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머리가 얻은 논리가 쉽사리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나와 내 친구 3명은 영어 회화 학원을 등록했다. 평소에 늘 붙어 다니며 친한 척, 비밀이 없는 척 방과 후 시간을 동고동락하던 사이였다.  

우리는 학원에서 그를 본 순간 일시에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우리 4총사 뿐 아니라 그 학원에 다니는 여학생들이 모두 그와 사귀고 싶어 했다. 그는 준수한 외모와 유머, 친절한 매너로 단박에 학원에서 뭇 여학생들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에 학원에서 영어 선생님은 롤 플레이를 할 때 꼭 우리 두 사람을 지목했다. 이를테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대본을 읽을 때는 그는 로미오역 나는 줄리엣 역을 맡도록 했다.



나와 그 사람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우리 4명이 늘 함께 있어서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약간의 트릭을 썼다. 그 전략은 아주 그럴듯했다.

학원이 저녁에 끝나면 우리 네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학원에서 우리 집이 가장 멀다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세 친구를 차례로 보내주고 마지막에 나만 남았다. 그렇게 우리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그와 나는 함께 영화를 보았고 술을 마셨다.  그도 많이 마셨지만 나도 엄청나게 마셨다. 동네에서 술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 하던 아버지의 딸 답게. 그는 술의 힘을 빌어 끊임없이 사랑 고백을 했다. 행복하면서 불행했고 편안하면서 불안한 나날이었다.



날이 갈수록 나는 사랑 이외의 것들로 몸살을 앓았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약사였다. 그는 금수저 였다. 우리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사꾼이었고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는 부모님의 아낌 없는 지원을 받고 있었고 나는 가난한 고학생 백조였다. 물 위에서는 남들과 다름없이 학원까지 다닐 정도로 평온했지만 물밑에서는 장학금을 타기 위한 공부와 아르바이트로 쉴 새 없이 분투하고 있었다.



데이트 비용은 1/n이었다.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나는 그가 남자친구라 해도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질 수 가 없었다. 그는 항상 좋아한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나는 나에 관한 모든 것이 부끄러웠다. 우리 집이 부끄럽고 아버지가 부끄럽고 엄마가 부끄럽고 거기서 태어난 내가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었고 결핍된 애정은 인간관계와 나의 열심으로 인한 성취로 채우려 했다.



그 사람은 그의 친구들에게 나를 그의 와이프라고 소개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무진장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의 진짜 아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나의 전공 과목은 쿨한 척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이었다. 조롱과 멸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느라 속에서 부글부글 마그마가 들끓어도 평온한 척 내색하지 않았다.



나의 내면은 말할 수 없이 허약했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지만 어이없게도 나 스스로는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겼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았고 타인의 구미를 맞추려 눈치를 보았고 타인의 가치관으로 내 행동의 방향을 결정했다. 연애할 감량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길이 꽃길만 있는 것이 아닐진대 이런 유리멘탈로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사소한 말다툼에도 움찔 하곤 했다.



그와 내가 나란히 4학년 졸업 반이 되었을 때 허약한 나의 사랑에 종말을 예고하는 사건이 왔다.

그는 유한 부모님들의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기획된 해외여행을 갔다. 로타리 클럽 회원들의 자제들을 위한 해외여행이었으니 부모들의 전략이 뻔히 보이는 여행이었다. 끼리끼리 대잔치의 장에서 그는 남자 청년의 대표가 되었다. 남자 대표의 상대편에는 여자 대표가 있었다. 둘은 많은 일을 소통해야 했고 그런 환경이 둘이 가까워지지 않으면 안되도록 몰아가고 있었다.



그가 해외여행을 떠날 때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질투를 하기도 지친 나는 우리의 허망한 앞날을 예감하며 시름시름 앓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사람이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별을 선언했다.

그가 왜 그러냐고 했지만 그냥 인사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저 여자 대표하고는 그냥 저러다 말거야, 아니야 이미 끝났어. 아니야 내 생각일 거야, 그 사람이 나랑 아직도 만나고 있잖아, 우리 사이 멀쩡해, 나의 자격지심 일거야.' 혼자서 엎치락뒤치락 소설을 쓰는 것도 도무지 할 짓이 못 되었다. 질투와 나 중심적인 해석을 오가며 끓탕하는 것만으로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나는 이별에 대해 점점 완강해졌고 그는 너가 정 그렇게 원한다면 그러라고 했다.

'이XXX야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니가 원하잖아.'

그리고 흰 눈이 속절 없이 내리던 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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