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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소금 May 23. 2024

한 섬에 걸리다

나는 주일학교 교사로 17년 째 섬기고 있다. 주일에 호세아서(호세야 1:1-11) 말씀을 듣고 가정의 달 5월에 어울리는 나눔제목을 뽑았보았다.   

'호세아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값을 치르고 고멜을 데려온 것 같이 값을 치뤄고 품어야 할 가족이 누구인가?' 인데 가족을 품기 전에 먼저 도저히 품을 수 없는 가족 혹은 주변인물은 누구인지를 나누었다. 


보석이가 먼저 가족은 아니지만 도저히 품을 수 없는 사람은 친구라고 했다. 보석이의 나눔이다. "축제 때 발표회가 있어서 친구들이 각자 역할을 맡아서 해야 할 일을 정했다. 그 친구는 리더였는데 A부터Z까지 모든 것을 자기가 통제하려 했다. 친구들이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서 의견을 말했는데도 그 친구는 아예 듣지 않았다. 자기 의견만 최고인 것처럼 행동했다. 고집불통이었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도를 넘어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굉장히 특이한 친구였다. 그 친구는 도저히 품을 수 없을 것 같다."


이어서 한별이가 가족 중에 고멜처럼 품어야 할 사람은 언니라고 했다. "조울증이 있는 언니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어른들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 언니는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지 않고 자기 기분대로 소리 지르고 대든다. 언니는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혀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나한테도 세상에 아무도 믿을 사람 없으니 사람을 함부로 믿으면 안된다고 누누이 말하곤 한다. 언니 때문에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다." 한별이는 자기도 힘들지만 언니를 돌봐야 하는 엄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힘든 엄마를 위해 자기라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집안이나 주위에 이런 고멜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내가 품기 어려운 고멜 같은 사람은 남편이다. 그럼에도 나는 남편과 장장 35년을 살았다.



남편과 나는 같은 회사에서 만났다. 대기업이었고 당시 공채 사원 중에 남자가 300명, 여사원은 유치원교사, 의무실 직원을 다 합쳐도 10명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남자들이 버글버글했다. 점심시간에 설계실과 연구실이 있는 건물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때 남자들이 꼭 일벌떼 같았다.대부분은 공대를 나온 엔지니어들이었고 엔지니어들은 거의 설계팀이나 연구실에 소속되어 근무했다. 



벌떼 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 심신이 두루 건강한 사람이 없을 수가 없을 터, 느긋하고 신중하면서도 뱀처럼 지혜롭게 분별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근처의 남자들을 소 닭 보듯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 때는 남자에게 먼저 관심을 두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일 뿐만아니라 어쩐지 숙녀 답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겉으로 활발한 성격과는 달리 그 방면에서는 고전적인 사고방식(내가 먼저 좋아해서는 안돼 법칙)으로 무장한 수동적인 깍쟁이였다.



여사원들이 남자 사원에 대해 퍼뜨리는 가짜뉴스 하나도 해석할 줄 몰랐던 나는 어장관리질을 청산하고 성실하고 유능하고 착하다는 말만 믿고 같은 사무실의 여직원을 통해 남편을 소개받았다.  

남편은 처음부터 유달리 적극적이었다. 남편은 틈 나는 대로 전화를 했고 허구한 날 퇴근 시간에 맞춰서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 



얼떨결에 남편이라는 한 섬에 걸렸다. 남편은 처음부터 나한테 미쳐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결혼을 하고 보니 나한테 미친 게 아니라 걍 미친 사람이었는데. 연애 시절에는 내 맘대로 할 수 있게 공주 대접을 해 주니까 한 섬, 남편에 대해 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 섬의 대표적인 정체성은 활화산(현재 활동 중인 화산 또는 지금은 활동하지 않으나, 앞으로 활동이 예상되는 화산을 가리킨다)이었다. 언제 분출할 지 알 수 없는 마그마가 들끓고 있었는데  당시에 내 눈에는 말만 하면 내 앞에 진귀한 보물을 갖다 바칠 수 있는 보물섬 쯤으로 보였다.    

섬에 정착하기 전에 돛단배라도 타고 들어가 한 바퀴 둘러 보고 집을 지어서 살만한 곳인지를 두루 살펴보아야 했는데 천지도 모르면서 교만질만 일삼던 나에게는 존재할 리 없는 품성이었다.



요새말로 아무래도 내 취향 아닌 듯 해서 이별을 통보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남편은 자기랑 결혼 해 주지 않으면 절(사찰)에 가서 머리 빡빡 밀고 스님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협박의 언어를 구사하는데 태도는 애걸복걸이었다. 그 때 남편의 태도는 자기 중심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나는 엉뚱하게도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면 이럴까, 이 사람과 결혼하면 신간 하나는 편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도 대기업 사원이니까 월급 따박따박 나올 것이고 때마다 학자금도 나올 것이니 큰 어려움 없이 살 것 같았다. 



기대와 현실은 보기 좋게 어긋나서 결혼 첫날부터 활화산이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신혼여행을 가는 날 공항에서부터 내 인생이 지대로 꼬이는구나를 직감했다.

남편이 여행 패키지가 계약과 다르다고 공항에서부터 따지기 시작했다. 신혼부부 패키지라고 했는데 신혼부부는 왜 우리밖에 없는 거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제 와서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제발 그만두라고 말했지만 남편은 그 문제를 두고 신혼여행이 끝날 때까지 투우장의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호텔도 5성급이라 했는데 4성급, 식사도 가는 곳마다 엉터리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남편이 아니라 누구라도 충분히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나는 남편을 공감해 주기는 커녕, 내가 있잖아,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왜 그러냐? 제발 그만하면 안 되겠니? 하고 남편이 여행사에 분통을 터뜨리는 것 이상으로 남편에게 화를 냈다. (남편은 오히려 나 때문에 화를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멋진 신혼여행을 안겨주고 싶었는데 그게 틀어졌다고 생각해서 참을 수 없지 않았나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남편은 결혼 전과는 완전 딴 사람이 되었다. 

'잡아 놓은 물고기에 먹이를 안 준다.' 라는 말이 있듯이 결혼 전에는 공주 대접을 해 주던 사람이 결혼을 하고 나서 나에 대해 갑자기 무념무상이 되었다. 그러다가도 사소한 일 앞에서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남편의 태도가 유달리 심하게 변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혼이라는 환경의 격변 속에서 결혼 전과 같은 태도를 견지하는 것 자체가 우려스러울 뿐 아니라 다소간의 변화는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그런 것에 무지했다. 나야말로 이기주의의 끝판왕이었다고나 할까? 



얼떨결에 정착한 섬의 화산 활동은 그칠 줄을 몰랐다. 우리 아부지는 술이 취했을 때만 행패를 부렸는데 남편은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우리 아부지보다 더한 난동을 부렸다. '아부지 같은 사람하고 절대로 결혼 안 한다' 가 나의 배우자 조건이었다. 그래서 술을 못 마시는 남편에게 점수를 듬뿍 주었는데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가 있었다.



 전두엽이 안정되지 않은 질풍노도기의 사춘기 청소년 같았다. 나중에 시어머니와 합가해서 살게 되었을 때 그때의 내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알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능력자 어머니에게 눌려 사춘기도 없이 움추려 살다가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권세가 부여되자 억눌렸던 사춘기의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교육학자인 '피아제'는 인지성장발달과정을 설명할 때, 인지성장 발달의 한 과정이라도 뛰어넘을 수는 없고 늦게 라도 그 과정을 밟게 된다고 했는데 남편은 결혼을 하고 사춘기의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런 내막을 알 턱이 없는 나는 남편을 이해할 수도 더구나 해석할 수도 없었다. 

'나도 너 못지 않게 승질 있거든.' 하며 남편이 뿜는 불 위에 기름을 부었다. 인간아, 내 말도 좀 들어보라고 하며 대들어도 막무가내인 남편에게 극단적인 언어를 쏟아내기까지 했다.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다. 



남편의 뒤늦은 사춘기와 사춘기 과정을 밟고 있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 인해 

우리 집은 수시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고 한 여름에도 우박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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