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분홍소금 Jun 06. 2024

여보,안돼!  인간아,제발!

남편의 예측 불가능한 분노 버튼과 낯선 서울 생활로 일상이 불안하고 불편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우울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아이들에게 더 집중했다.



아이들은 그 때까지 전적으로 내 편이었고 그런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갓난아이는 갓난아이대로 1살은 1살 대로 성장 단계마다 그 때에만 줄 수 있는 기쁨을 주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들의 웃음과 말 한마디로 일상의 피로가 씻겼다.



아이들 앞에서는 조심을 하느라고 했고 덜 다투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남편과 싸우지 않고 살 수는 없었다. 남편과 내가 언성을 높이면 딸은 짜증을 내며 시끄럽다고 했지만 유약한 아들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당시 남편은 서울 본사에서 중간 관리자로서 기획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회사가 저녁이 있는 삶을 표방하며 근무시간을 7 to 4로 조정하는 바람에 7시 출근 시간에 맞추기 위해 남편은 이른 아침에 집에서 출발해야 했다. 애초에 회사에서 정한 근무시간에 의하면 7시에 출근을 했으니 4시에 퇴근을 해야 했지만 퇴근 시간이 지켜지지 않아 남편은 전보다 더한 격무에 시달렸다  



부재 중 남편이 부재 중 아빠가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회사 때문에 그러려니 하며 웬만한 것은 다 이해하고 넘어갔다. 언제부터 인가 나와 아들과 딸, 우리 셋은 하나로 똘똘 뭉쳐 남편과 아빠가 없는 삶에 불평 없이 잘 적응해 나갔다. 남편보다 내가 훨씬 많이 일하고 훨씬 많이 참고 사는 걸로 내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큰소리치며 남편의 외로움이나 고달픈 회사 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휴일에 남편이 집에 있어도 우리끼리 외출을 했다. 셋이서 박물관에도 가고 연극도 보고 음악회도 갔다. 방학이 되면 일주일에 한 번 꼬박꼬박 대학로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포천에 있는 광릉 수목원에도 자주 갔다. 예약제가 생기기 전이라 가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던 때였다.



체험 학습을 빙자한 문화 생활에서 가장 즐거웠던 사람은 나였다. 박물관에서 오래오래 제일 자세히 보는 사람도 나였고 연극을 보면서도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관람한 사람도 바로 나였다.

어느 해 연초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는 빈필의 내한 공연 티켓을 사기도 했다. 우리 집의 경제 수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고가였지만 그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용단을 내려야 한다며 그렇게 했다. 두 아이는 고가의 티켓 값이 무색하게 앉자마자 잠들었다. 자가당착에 빠져 아이들의 눈높이와 상관없이 서슴없이 뻘짓을 해 대는 허충 엄마에게 이끌려 온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문화 생활과 체험 학습보다 더 많이 공을 들인 것은 책 읽기였다. 어린이 책을 공부하기 위해 인근 어린이 서점에서 어린이 책 공부 모임 엄마들과 함께 책과 관련된 활동도 열심히 했다. 어린이 책 공부를 위한 커리큘럼을 짰다. 커리에 있는 책들을 읽으며 토론도 하고 서평도 쓰고 활동지도 만들었다. 모임을 진행하며 어른들의 손가락 인형극 공연과 더불어 아이들이 직접 공연하는 어린이극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집에서 나던 큰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침내 우리 가정에도 평화가 찾아온 줄 알았다.



그런데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어느 날 뜬금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남들이 다 부러워 하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이라니? 도대체 무슨 사업인데?"남편이 하려는 사업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다단계 사업이었다. 기가 막혔다. 제정신이냐며 격렬히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남편은 다단계 사업을 위하여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남편의 상위 사업자 두 분이 우리 집에 왔다. 전직이 교사라고 하면서 얼마나 전망이 밝으면 교사를 그만두고 사업에만 전적으로 매달리겠냐며 하루가 멀다하고 집요하게 찾아왔다.

남편과 두 여성 사업자의 성화에 못 이겨 제품 설명회와 프로모션에 참석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수시로 열리는 랠리에도 갔다. 토요일에 열리는 지방 랠리 참석을 위해 아이들은 수시로 조퇴를 했다. 평온하다 생각했던 일상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남편과 상위 사업자들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남편은 자기가 벌써 상위 핀인 다이아몬드를 획득한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안타깝게도 그들의 시그니처 상품인 디쉬드랍 한 병도 팔지 못했다. "사업 설명도 좋지만 판매를 해야지?" 하면 그건 나중에 저절로 되는 것이라 했다.



남편 뿐 아니라 나 역시도 제품을 권하지도 판매하지도 못했다.

남편과 두 여성 사업자가 나를 데리고 다니며 동기부여를 수도 없이 해 주었지만 제품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 제품들을 대체할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품들 확신이 없었다. 자신의 제품이 최고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눈빛과 목소리가 다른 법이다. 확신에 찬 태도가 있어야 상대방에게 신뢰를 줄 것인데 그런 것들이 나의 밑 바탕에 깔리지 않으니 결과는 보나마나 였다.



애초에 나는 내게 속한 것들을 최고라고 믿을 만한 자존감도 자신감도 없는 사람이었다. 뭐든 열심인 것은 별볼일 없는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한 방어 기재에 불과했다.(아마도) '나는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어쩔래?'그런데 남편은 이번에도 열심 당원인 내가 모든 것을 잘 해 내리라 철썩 같이 믿으며 나한테 판매와 실적 등 모든 것을 떠넘겼다. 이런 미친 짓을 당장 그만둬야 한다고 할 때마다 분노를 폭발하며 지랄총량질을 이어 나갔다. 나는 사업이니 다이아몬드니 하는 것에 넌더리가 났고 나를 이용하기 위해 혈안이 된 남편이 이해도 용서도 할 수 없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남편은 민폐질을 일삼았다. 첫 번째 피해자는 어머니와 시댁 식구 들이었다.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느닷없이 찾아가 어머니 댁에 불러 모아 놓고 다짜고짜 사업 설명회를 했다. 식구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 장남의 권세를 휘두르며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나의 대학 동창들과 고향 친구까지 소환하며 무작정 연락을 넣으라고 채근을 했다. 계획도 없고 일정도 없었다. 매사 막무가내 정신으로 밀어붙였다. 그들을 만나려고 인천도 가고 부천에도 가고 경상도에도 찾아가도 경기도를 방문하기도 했다.



대학 동창 부부를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부부가 CC이었기에 둘 다 나와는 아주 잘 아는 친구 사이였다. 식사나 한번 하자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해서 우리는 '옳다구나' 기분이 좋아져서 친구 부부가 사는 동네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식사를 하면서 남편이 사업에 대해 소개를 한답시고 썰을 풀었다. 그런데 친구 남편은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즉시 반격을 했다. 학창 시절에도 달변이었던 친구는 한층 업그레이드 된 언변으로 그 사업을 하면 안되는 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5분 남짓 썰에 장장 두 시간을 침을 튀기며 하는 그의 연설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주제도 없고 맥락도 없는 길 잃은 대화에 지친 나와 남편은 급기야 "화장실에 갔다 올게." 하는 유치한 거짓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고향 친구 부부는 우리를 귀한 손님 맞이하듯 극진하게 대접했다. 이런 친구에게 다단계 사업을 같이 하자는 말을 해야 한다니, 배신도 그런 배신이 없어 보였다. 남편을 꼬집으며  갖은 눈짓으로 "여보,안돼, 인간아, 제발!" 사인을 보냈다. 남편은 나의 손짓 눈짓을 가뿐하게 무시했다. 남편이 사업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을 때 친구 부부가 짓던 황당한 표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생각을 하면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친척들에게 떠안기다 시피 하며 딱 한번 맨 처음 단계의 실적을 달성했지만 이후에도 여전한 방식으로 단 하나의 제품도 판매하지 못한 채 집안 곳곳에 쌓인 제품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1년 만에 손을 털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취직 준비를 하고 이력서를 넣었다. 대기업 핵심 부서에서 14년을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인지 이력서를 넣는 족족 합격이 되었다. 한창 IT붐을 타고 있을 때라 공대 출신 엔지니어였던 남편은 인기가 많았다.여기저기서 불러 주었다. 아무 데나 가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좋은 회사처럼 보였다.


그런데  남편은 전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곳에 반색을 하며 취업을 결정했다.

유명한 레스토랑의 월급 사장 자리였다.  "엔지니어가 사장이 웬 말이냐 ?" 식음을 전폐한 채 3일을 반대 시위를 했지만 암소같이 완강한 남편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사장, 우두머리, 최고 권세자와 같은 타이틀의 유혹을 끝까지 떨치지 못했다.  

남편은 사장이 되었고 사장이 된 지 한 달 만에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던 여직원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가 버렸다. 운명의 여자를 만났다 카면서(브런치 북 '그럼에도 이혼하지 않았더니'참조)

이전 03화 고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