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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소금 May 30. 2024

고백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결혼생활이 어때야 되는데? 하고 묻는 다면 그에 대한 답변도 이렇다하게 떠오르는 건 없지만 최소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은 확실했다.

인생이 자주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결혼을 하기 위해 퇴사를 했었다. 여직원들이 결혼을 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었고 이전과 다른 새로운 할 일들이 수두룩했다.

친구들이 전화를 했다.

"집에서 놀면 안 심심하나?"

"놀다니? 냉장고에 식재료 안 썩히고 안 버리려면 하루 종일 움직여야 돼, 쉴 틈이 없어."

이 말은 갓 결혼한 친구들 사이에서 명언으로 등극하여 한동안 회자되기도 했다.

최근에도 야채 칸에 초록색 액체 괴물 처럼 변한 오이 상추 양배추를 버리느라 식겁했고 약간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부로서의 타격감은 그때와 비할 바가 아니다. 살림을 한창 할 때는 그런 일은 주부가 저질러서는 안되는 칠거지악의 하나처럼 여겨졌다.

전업주부로서 꽤나 바지런을 떨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나고

김대희(아버지) 신봉선(엄마) 장동민(아들)이 하던 개그 코너, '대화가 필요해' 에서 처럼 무관심과 대화 없음 속에서도 아들이 떡 하니 있는 것처럼

우리집에도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이라는 새로운 섬의 탄생이었다. 이제 내가 이 섬을 누구나 부러워하는 멋진 섬으로 만들어야지, 했던.

나도 다시 태어났다. 우울한 아내에서 극성 엄마로.



딸은 엄마의 친구가 될 것이지만 아들이 엄마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들은 공인의 운명을 타고 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훌륭한 공인이 되어야 하는 거잖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 없는 번듯한 아들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현명한 엄마가 되어야 했다.  롤모델이 누가 있을까? 가만있자, 정트리오의 어머니 이원숙여사님? 아님 가수 이적 삼 남매의 어머니 박혜란 작가님?



아들을 낳으니 우울할 겨를이 없었다. 누가 산후 우울증 때문에 힘들다고 하면 그게 뭔데? 했다. 내 안에 있던 그 동안의 지루함과 우울이 거센 치맛바람에 떠밀려 멀리멀리 휩쓸려 가고 그 자리에 사랑이라는 탈을 쓴 욕심이 자리를 잡았다. 라떼에는 독박 육아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거 아닌가? 하고 남편의 도움 없는 육아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사실 그런 시대 정신을 넘어 자발적 독박 육아에 가까웠다.  그 편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다. 당시 남편은 내겐 악의 축이나 다름없었다. 아이가 이상한 남편의 영향을 받으면 안 되었다. 남편이 육아에 개입하는 것이 싫었다.



아기는 남편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주었다. 아들에게 최고의 교육 환경을 조성해 주려고 애를 썼다. 육아 서적도 부지런히 읽었다. 아이를 위해 책을 아주 많이 샀다. 그 많은 책을 사들인 이유는 자명하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섯 수레의 책은 읽어야 한다고 한 중국 시인 두보의 말이 아니더라도 책을 많이 읽어야 똑똑한 아이가 될 것  같았다.  아이의 발달 과정에 맞지도 않는 책을 예사로 미리미리 샀다. 그림책도 사고 창작동화도 사고 명작동화도 빠지면 안 되었다.



아이가 자라감에 따라 장난감이 지천으로 깔렸다. 아들은 자동차를 좋아했다. 특히 커다란 장난감 차 보다는 모형 자동차인 미니어처를 좋아해서 한창 사서 모을 때는 하루에 하나씩 산 적도 있었다. 미니어처는 일반 자동차보다 훨씬 비쌌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블록도 사고 레고도 단계별로 갖추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법! 글로벌 인재가 되려면 영어는 필수. 열혈맘이 영어 교육을 빼놓을 리가 없었다. 90년대에는 영어교육용 비디오 테잎이 한참 유행했다. 일본에서 만든 것도 사고 영국산 미국산 영어 테잎을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핑구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아 당시 대 유행을 이끈 영어 비디오 테잎들을 검색했는데 검색이 되지 않아 놀라웠다.)



어느날 마트에서 아들이 a toy store is over there  할 때는 영어 교육이 결실을 보는 것 같아 내색하진 않았지만 어깨가 저절로 으쓱했다. 아들이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bank tree 라고 할 때는 영어를 가르쳤더니 덤으로 창의력까지 건지는구나 했다.  



공부,공부 타령만 하는 욕심쟁이 엄마 말고 우아하게 아들의 교양과 삶의 질까지 생각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절대 음감을 위해 6살에 피아노를 시작했다.악보 읽는 법을 겨우 터득할 때에 바이올린도 곁들였다.



아내의 역할도 충실히 했다. 아이의 교구나 교제를 사는 것 빼고는 알뜰하게 살림을 했다. 김치는 직접 담그고 반찬도 때마다 만들었다. 저녁마다 와이셔츠를 다리고 아이가 낮에 노느라고 어질러 놓은 집을 새벽까지 치웠다.

"내일 어지를 건데 왜 치우노?" 하면

"애가 어지르는 재미로 놀잖아, 그때그때 안 치유면 안된다 했다."



따지고 보면 나의 육아 방식은 90년대에 더러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했다. 나도 엄마는 처음이고 첫 아이 때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인 것도 맞고 자식 욕심 없는 사람이 있나? 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나의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나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짐작한다.

하지만 나의 과오가 최악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그것은 남편에게 대하던 방식 그대로 아들에게 행했다는 것이다.



나는 남편이 유사 급발진 장애와 같은 상황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나의 옳음을 증명하기에 급급했다. 남편이 왜 저런 말을 할까,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도, 그의 마음속을 살필 줄도 몰랐다.



타고난 기질이 유약하고 순했던 아들은 제때 제때 마음을 표현할 줄 몰랐다.(남편과 똑같음) 아니, 마음을 표현했어도 내가 듣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아들을 나는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인 줄 알았다. 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엄마는 고생하는 사람이고 엄마가 하는 말은 옳고 엄마에게 반박해도 엄마는 보란 듯이 그럴듯한 논리로 찍어 눌러버려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 생각대로라면 아들은 리더쉽도 있고 공부도 잘해서 누구나 인정하는 과고(과학고)도 가고 '사'자 달린 그 무엇이라도 될썽 불러야 했다. 

그러나 아들 점점 소심해지고 말이 없어졌다.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은 "아무거나,"  "괜찮아,"  "몰라,"가 대부분이었다. 아들의 성향과 기질, 속마음을 무시하고 나의 애정 결핍과 불안, 우울 등 건강하지 못한 마음의 회로에서 비롯된 열심만 가득찬 육아의 결과는 참담했고 두고두고 댓가를 치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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