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분홍소금 Jun 13. 2024

사교육1번지 강남에서

남편이 집을 나가버리고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남편의 빚을 갚은 후, 부산에 있는 시어머니댁으로 들어가 더부살이를 했습니다.(브런치 북,'그럼에도 이혼하지 않았더니' 자세히 기술)

심신이 녹초가 되었을 때 아이들의 상급학교 진학 문제를 들먹이며 서울로 이사를 하는게 어떻겠냐고 하는 저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부산에 간지 5년만에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중3, 딸이 초6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부산에서 친구들과 노는 재미가 들려 있었기 때문에 왜 또 서울이냐며 싫어했습니다. 특히 이사과정에서 아들이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딸은 입시학원 등록을 위해, 저는 취업을 위한 교육일정을 맞추기 위해 아들보다 한 달 먼저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부산에 남겨진 아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남편이 이삿짐을 꾸리는 것을 아들에게 시켰기 때문입니다. 박스에 짐을 싸는 과정에서 아들은 아빠의 무수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제가 이사한 동네는 자타공인 교육1번지였습니다. 강남8학군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서울로 오려는 표면적인 이유가 딸의 특목중입시였기 때문에 거주지를 정할 때 입시학원과 가까운 지역이면 좋겠다 했습니다. 지역이 정해지면 우리가 가진 금전의 액수에 맞추어 거처을 구하리라 했지요.



입시학원 근처로 집을 구하다 보니 어쩌다 강남(민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돈키호테 유전자라도 숨어 있는 사람처럼 입시학원이 해결되면 그 외의 것들은 다 비본질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공부가 본질이요 그외의 웬만한 것들은 다 비본질이 된 동네와 거기에 찰떡궁합처럼 한마음이었던 성취지향적인 저에게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행보라고나 할까요?



서울에 올라오자 우리는 이제 그 지긋지긋한 불행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행 끝 행복시작'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셋은 이제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뭐라도 될 것 같았지요.

"얘들아, 엄마 열심히 돈벌테니 너희도 열심히 공부하렴." 더 이상의 말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건 순전히 내 관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아이들도 내 맘과 같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도와 상관없이 부산에서의 느슨하고 행복한 일상과 대비되는 곳에 뚝 떨어진 아들은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부에 특화된 아이들이 모여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전장 같은 곳에서 아들은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했고 버거운 일상을 게임으로 도피했습니다.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린 아들은 시험기간에도 게임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냥 열심히 살면 되는 거쟎아, 그게 그렇게 어렵나?" 제 말처럼 저는 열심히 일을 했고 일을 하는 틈틈이 게임하는 아들을 질책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보다는 내생각과 정반대로 가는 아들을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의 힘듦에는 무관심한 채 저의 감정에만 꽂혀있었던 셈이지요.



세상에 공부 잘하는 좋은 아들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들은 고생하는 엄마를 봐서라도 좋은 아들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안하는게 아니라 못해서 못하는 것인데 그때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예민한 아들은 점점 말이 없어졌고 혼내기라도 할라치면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사실 아들의 방황은 서울에 왔기 때문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차곡차곡 쌓여서 곪았던 것이 사춘기와 맞물려 터진 것이라 봅니다. 부모의 잦은 다툼, 아빠의 외도와 무관심, 엄마의 미친 교육열, 뜬금없는 두 번의 장거리 이사등은 예민하고 소심한 아들이 벌렁벌렁 적응하기에는 무척이나 버거운 것이었을 테니까요.


"싫어, 못해, 안할거야, 꺼져버려!" 하고 속시원히 질러 버렸으면 좋았으련만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아들도 역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무서운 아빠에게는 물론이요 엄마인 나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편에게 시어머니가 넘사벽이었듯이 아들도 엄마인 저에게 비슷한 감정이 아니었나 합니다.

엄마는 집안을 이끌어가는 사람, 정신승리와 노오력으로 똘똘뭉쳐 열심히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존재, 그런 엄마에게 어떤 아들이 마음놓고 감히 지랄 총량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과유불급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떤면에서 지나친 엄마보다 부족하고 못나 보이는 엄마가 훨씬 편한 엄마일 가능성이 높아서 그렇습니다.  속에 있는 말을 속시원히 질러 버릴 수 있는 편한 엄마야말로 아이들에게 최고의 엄마가 아닐까 합니다. 적어도 불편함과 불만과 화를 애써 참으며 착한아들로 사느라 마음이 병들지는 않을 테니까요.


딸도 학급에서 왕따를 당했습니다. (딸은 자신이 왕따인 줄도 몰랐다고 합니다.) 딸은 지방에서 온 전학생이라 아이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고 학급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왕따 그룹이 되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딸을 왕따 시켰던 그룹의 아이들은 자기들 끼리 다투고 싸우면서 와해되었고 왕따 그룹아이들은 졸업할 때까지 친하게 지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만나러 다닐 정도로요. 학원에서는 비록 입시반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학원에서 정해준 반에 들어가 열심히 했습니다.


아이들을 전학시키고 저는 독서관련 회사에서 독서논술 교사를 위한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일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처음 맡은 지역은 교통이 가장 불편한 강남의 끄트머리 지역이었습니다. 자차도 없이 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힘든 줄 몰랐습니다. 학생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는 것은 적성에 잘 맞았습니다. 책읽기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였습니다. 저의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흥미와 즐거움은 아이들에게 전염되었고 덕분에 보다 재미있고 열정적인 수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아 집 근처 대0동으로 입성했습니다. 엄마들은 경제력은 말할 것도 없고, 똑똑, 고상, 교양을 두루 갖추었고 아이들은 온실 속 화초처럼 순둥순둥했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엄마가 공들여 짜 놓은 살인적인 학습 스케줄을 소화했습니다. 학습노동이 장난아니었지요.  국영수 과목은 대개 학원 1개와 과외 1개가 기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우리집 안방보다 큰 아이들의 방에는 스탠딩 테이블과 화이트보드가 떡하니 서 있었습니다. 용도를 알아 맞춰 보실까요? 네, 하나는 졸음을 쫒는 용도로 쓰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졸리면 스탠딩 테이블 앞에 서서 잠을 깨는 것이지요. 화이트 보드의 용도는 훨씬 더 다양합니다. 과외 선생님들이 필기를 할 때 주로 사용하지만 시험공부를 할때 공부한 내용을 써 볼때도 유용합니다.



학원에서는 그들을 엘리베이트 타고 가는 모범생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계단으로 걸어가는 답답한 인간이라고 대놓고 말했습니다. 직접 들었어요.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는 임영웅씨(개인적으로 임영웅씨 버전 최고요)가 불렀던 트로트에만 있는 말이 아니더군요.



부족함 없이 잘 갖춰진 교육 환경에서 아이들은 도장깨기 하듯 일과를 소화하며 목표를 향해 한계단씩 착착 올라가고 있었습니다.(물론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일방적인 밀어붙임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거나 조기유학을 가거나 자퇴를 하는 집도 많긴합니다.)

저는 그런 엄마와 아이들을 보면서도 기죽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이나 신포도의 마음보다는 오르지 못할 나무에 대한 패싱이나 국어 실력(주제파악)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이야기가 좀 샜습니다.

다시 한 섬, 남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가 부산으로 올 즈음 남편도 시장일을 청산하고 지방에 있는 새 직장에 취업이 되어 갔습니다. 저는 남편과 떨어져 살게 되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안 보고 살고 싶었지요. 그런데 두달도 못되어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그야말로 멘붕이었지요.(다음 화, '부서지고 깨어지고'에서계속)


이전 04화 여보,안돼!  인간아,제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