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얼떨결에 걸린 한 섬은 감옥으로 변했습니다. 그 섬에 대한 미움과 분노에 갇혀서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갔습니다. 그때 저는 40대였는데 콕 집어 아픈 곳이 없었는데도 아침에 일어나기가 지독하게 힘들었습니다. 하고 있는 일이 없었다면 하루종일 누워서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지냈을 확률 100퍼였지요. 평일과 토요일을 합쳐서 주 6일 일을 하고 일요일에는 교회를 갔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이면 몸살을 하는 패턴이 반복되었습니다. 월요일은 하루종일 끙끙 앓다가 저녁무렵에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수업을 하러 갔습니다. 우울로 인한 스트레스가 몸으로 나타난 것인데 그것을 신체화라고 하지요.
쉬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사실 명절에는 친정에도 가고 교회에서 여름, 겨울 수련회를 위해 외부에서 2박 3일씩 지내다 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깥나들이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들이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에 또다른 복병이 나타났기 때문이었지요. 집으로 오는 날이 되면 몸이 먼저 알고 몸살 난 것처럼 아파왔습니다. 집이 가까워질 때의 전신을 휘감는 아픈 느낌이 싫어서 어디를 가기가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몸이 얼마나 정직하며 마음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때 절절히 깨달았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최후의 통첩을 했습니다. "당신이 아픈 것 맞다. 당신이 몸도 아프겠지만 마음이 더 아픈 것 같다. 우리 가족 모두 정상이 아니다.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 우리도 정신과를 가겠다. 당신도 정신과 치료를 받으시라. 만일 당신이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신과 같이 살 수 없다."
남편은 노발대발 했습니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나는 정신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 너희는 다 미쳤으니까 정신병원에 가서 치료받아라." 집에 있던 딸이 나섰습니다.
"아빠는 왜 아프다고 하면서 병원을 안 가세요?" "내 병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내병은 내가 고친다."
"정신과는 미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사람이 가는 곳이예요. 정신과에 가서 상담 받고 약 먹었으면 좋겠어요. 아빠, 제발 우리 가족 병원에 같이 가요." 딸은 울며불며 통곡을 하며 남편에게 치료받을 것을 호소했습니다.
딸의 호소와 설득에도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멀쩡한 사람보고 병원에 가자고 하냐며, 정말 미친사람 처럼 변해서 딸의 멱살을 잡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제가 나서서 말려보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때 벨소리가 울렸고 현관 문을 열자 경찰 2명이 들어왔습니다. 이웃에서 뭔일 났나, 하다가 불안해서 신고를 한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딸의 찰과상을 치료 받은 후, 경찰서로 갔습니다. 경찰서에서 이곳 저곳 다니며 경위서를 썼고 남편은 경찰서에 남았습니다. 경찰에서는 격리가 필요하다며 구에서 운영하는 쉼터에서 1주일을 머물도록 조치해 주었습니다.
남편은 그즈음 교회를 나오게 되었는데 남편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우리의 고난도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남편이 성경구절을 들이대며 너희가 교회를 다니고 주일마다 설교를 들으면서 왜 설교 말씀대로 살지 않냐고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지요.
새벽까지 성경을 틀어 놓고 들어보라고 하면서 왜 이대로 안하냐? 교회다니면서 뭐하냐고 괴롭혔습니다. 남편이 빼어든 신종 괴롭힘은 어디가서 말할 수도 없는 고약하기 짝이 없는 킬러 문항이었습니다.
그날도 무엇에 꽂혔는지 남편은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 구절을 반복해서 들려주며 너희는 왜 나를 공경하지 않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미 새벽1시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잠 좀 자자고 했지만 지금 잠이 오냐고 하며 노발대발했습니다. 당신은 낮에 잤으니까 잠이 안오지, 나는 잠을 자야 한다. 그러니까 잠 좀자게 해달라고 했다가 3차대전이 벌어졌습니다.
웬만한 일에 꿈쩍도 하지 않던 아들이 "우리집 콩가루 집안 맞네, 이 집구석에서 더 이상 못 살아. 엄마, 솜아, 나가자." 아들의 주도로 새벽2시가 다 되어 우리는 집을 나왔습니다. 가까이 살고 있었던 언니집에서 눈을 붙이고 다음 날 집으로 가보니 남편이 집을 나가고 없었습니다. '셋이 나가는 것보다 내가 나가는 게 낫겠지.'라는 문자를 남겼지만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남편이 집을 나가고 우리는 행복했을까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힘들게 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서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 일상을 평온하게 살게 되지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서 콩가루 집안이 갑자기 스윗홈이 될 리가 없었지요. 남편이 남긴 그림자가 없어지는데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거대한 적 페르시아라는 공통의 적을 맞아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하나가 되어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들을 괴롭히던 적이 사라지자, 곧바로 자기들끼리 싸운 것처럼(펠로폰네소스전쟁) 남편이라는 공공의 적이 사라지자 저와 아이들은 한동안 우리끼리 마구 다투고 할퀴며 싸웠습니다.
저와 아이들은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거친 말을 쏟아 냈습니다. 무서운 사람이 없어지니 그동안 쌓였던 말들을 거리낌 없이 쏟아낸 것이지요. 짜증과 분노 폭발과 다툼이 대화를 대신했습니다.
아이들이 그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을 쏟아낼 때마다 저는 아이들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기 보다 온갖 생색의 창과 방패를 휘둘렀습니다. "야 , 너희가 돈 없어 못한 게 뭐 있어?"소리를 꽥꽥 질렀어요.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엄마가 꼭 아빠처럼 행동하네" 했습니다. "뭣이라?"우리집에서는 '꼭 아빠같았어.' 가 가장 큰 욕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아들에게 무심코 지애비 닮았다고 했다가 아들이 기분 나쁘다고 집을 나가 버릴 정도였지요.(지금은 자기 입으로 아빠 닮지, 누굴 닮노 인정함)
다소 거친 방식이었지만 싸움과 다툼으로 마음을 털어놓으며 저와 아이들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애썼다고 하며 위로하고 격려할 마음의 여유도 얻게 되었지요.
우리가 가끔 같이 외출을 했을 때 지하철역이나 서울역 같은 곳을 지나갈 때면 아이들은 주변을 유난히 살폈습니다. 뭐 보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아빠가 있는가 보려고." 라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순간 심쿵했지요.
아이들에게 친아버지란 그런 것이구나, 아무리 힘들게 하고 고통을 준 아버지라 해도 아버지가 아저씨가 될 수는 없음을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이상한 아버지라도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녀들도 핏줄로 맺어진 친아버지를 쉽사리 어찌 하지 못하는 건 매 한가지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자기 의지로 끊어 낼 수 있는 관계였다면 애초에 천륜이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을 테지요.
아들은 군대를 갔고 얼마 후에 남편에게서 기도원에 있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