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돌아왔습니다. 서울에서 집을 나간 지 6년만이었습니다. 왕의 귀환인가? 돌아온 탕자인가?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은 겉모습은 탕자였지만 속은 왕이었지요.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자기 자리를 찾고 싶어했습니다. 남편이 찾고자 하는 자리는 평범한 가장보다는 전제군주에 가까웠습니다. 마음대로 명령하고 지시하며 자기 말이 법이 되기를 바랐지요.
우리는 당시에 어느 곳에 위치해도 집 안 여기저기가 한 눈에 보이는 오래된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남편이 들어오자, 높은 인구밀도로 인해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환경도 최악이 되었습니다. 삶의 질이라고 이름 붙이기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 집을 이야기 할 때 카타콤이라고 주저없이 부르곤 합니다.
남편이 일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집에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은 시시콜콜한 잔소리와 간섭이었습니다. 뜬금없이 아이들 밥상머리에서 야채를 먹지 않고 편식한다고 야단을 쳤고 아버지에 대한 예절, 조상에 대한 예절에 대해 기본이 안되어 있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식구들의 영혼 없는 예스에 남편은 스스로 격앙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폭발했습니다.
수업을 끝내고 우리 동네 집 근처로 접어 들면 주위가 시끄러웠습니다. 남편이 아이들을 야단치며 내는 소리가 거리로 뿜어져 나온 것이었지요. 자기 화에 못이겨 의자와 집기들을 던지거나 탁자나 방문을 주먹으로 치는 소리가 굉장했습니다.
이런 풍경을 자주 맞닥뜨리다 보니 집이 가까워 올수록 걸음이 천근만근이 되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의 쇳덩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동네 부끄러운 것은 오히려 나중 일이 될 정도로 남편이 던지는 물건에 맞아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할 정도의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무슨 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급히 집으로 올라가 남편을 말렸습니다. 가정에서 설 자리를 잃은 남편은 독이 오를대로 올라서 무슨 말을 해도 곧이 듣지 않고 병적인 화를 냈습니다. 조금만 토를 달아도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 자기를 향한 공격으로 받았습니다. 아들은 엄마가 말리면 자기들이 더 힘들어지니 차라리 엄마는 못 본 척 가만 있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아들은 강남의 명문고등학교에, 딸은 목표했던 특목중에 입학했습니다. 수석입학이라고나 할까요? 딸은 학교 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학교는 날마다 이벤트가 벌어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딸아이를 보며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려 살만 하게 하시는가? 사람이 죽어란 법은 없구나, 했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니 저도 좋았습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아이에게 학교가 즐거운 곳이라고 해서 모든 아이들에게 다 그런 곳은 아니었습니다. 졸업식날에 만난 아이 친구 엄마는 이제야 깜깜한 터널에서 빠져나왔다고 하면서 터널에서 잘 견딘 자기모녀를 셀프 칭찬하는 이벤트라도 해야 겠다고 하셨습니다. 맞다. 칭찬과 격려는 이럴 때 하는 것이구나 했지요.
그 당시 우리집이야말로 깜깜한 터널 안 어떤 지점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울 식구는 모두 터널을 두려워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것을 가장 두려워한 사람은 바로 남편이 아니었나 합니다. 터널을 마주하고 그곳에 불을 밝히고 걸어가기에 적당하게 만드는 것이 버겁고 무서워 지레 겁을 먹고 아이처럼 소리를 질렀던 것이라 여겨지겨든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현관 앞에서 발을 멈추고 현관에 귀를 대었습니다. 집안에서 아빠 소리가 들리면 아들은 빡치고 딸은 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현관문을 열지 못하고 계단을 다시 내려와 집 주위를 몇 바퀴 빙빙 돈 후에 겨우 용기를 내어 들어 갔습니다. 그 때는 꼭 상어 뱃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고 나중에 둘이서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 겪는 고통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외도로 눈이 뒤집혀 힘들게 했던 것을 깡그리 잊을 정도였지요.
남편이 무서웠습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지요. 남편에게 어서 일자리를 구해서 돈을 벌어오라고,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남편은 자기는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몸이라고 했지요. 뭔데? 그럴 수 없는 몸이라는 게 도대체 뭐죠? 몸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여기 저기 아파서 일을 할 처지가 못되니 몸을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지요.
몸이 아프면 병원을 가야지. 하면 자기가 의사보다 자기 병을 더 잘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 더러 가장이 아프다고 하는데 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냐고, "가족이 뭐냐? 한 사람이 아프면 돌봐줘야 하는게 마땅하다, 온 식구가 달겨들어서 가장의 병을 낫게 하려고 집중을 해도 시원찮은데 날 더러 돈을 벌어 오라고? 그말은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지 않느냐? 아픈 사람더러 돈을 벌어오라고 하는 너희가 인간이냐? 너희가 그러고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냐?"
'나는 환자다.' 라는 방패를 휘두르며 돈 벌어 오라고 하는 말을 입밖에 꺼내지 못하게 원천 봉쇄했습니다. 역반하장으로 저를 아픈 사람을 학대하는 핍박자로 몰아갔지요. 남편이 빼든 새로운 카드는 저를 한계상황까지 끌고 내려 갔습니다. 요즘처럼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흔하게 쓰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남편은 뜸을 뜨서 병을 고치겠다고 하며 매일 한 번씩 뜸을 떠 달라고 했습니다. 도자기 컵으로 된 뜸기를 등짝에 붙이고 뜸쑥에 불을 붙였습니다. 쑥에서는 연기가 났는데 뜸을 한 번 뜨기 시작하면 온 집안에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환기를 시켜도 뜸쑥 특유의 냄새가 집안에 스며들어 이곳저곳에 배였습니다. 이불, 옷, 외출복, 교복 등 가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면 친구들이 담배피냐고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연기는 바람을 타고 윗집, 아랫집으로도 퍼져나갔습니다. 뜸에 중독이 된 남편이 뜸을 안 뜨면 당장 죽을 것 같다고 설레발을 치니 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봄이 왔습니다. 내키지 않아 불만이 가득한 저의 심신은 살얼음을 띤 겨울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폭발직전까지 갔습니다. 외도가 아니라 뜸 때문에 이혼하고 싶을 지경이었으니까요.
꽁꽁 얼어붙은 마음은 언제 녹나, 하고 있던 어느 날 위층에 사는 아저씨가 고약한 연기냄새가 집에 올라와서 불편하다는 민원을 넣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민센터 직원이 현장 조사를 왔다 간 날 드디어 징하고 징하던 뜸뜨기가 멈추었습니다.
그 때 남편은 몸보다는 마음의 병이 심각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아픈 사람에게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사고와 행동을 요구하며 저는 줄곧 지옥을 살았습니다. 심신이 탈탈 털렸습니다. 불행 끝 행복시작이란 기대는 유리잔처럼 깨진 지 오래였습니다.
매일 매일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 같은 고난이었고 인생의 바닥을 경험하며 많은 것들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제일 먼저 고난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깨지지 않을 자아가 깨어지고 고정관념이 부서졌지요. 겹겹히 쌓여있던 방어기재도 하나씩 해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움과 분노의 여정이 한사람을 살리는 위대한 여정이 되기까지 놀라고 놀라는 일은 한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하박국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대답
하박국 1: 5~11 요약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