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납고 성급한 남편 사람으로 인해 급히 몰아치는 바람에 이리저리 날렸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탈탈 털린 심신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인생드라마에 반전의 묘미가 있듯이 저의 인생에도 선물 같은 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림같은 가정은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럴 듯한 가정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은 힘든 시기, '그 세월' 을 썩을 속이 없을 정도로 속을 썩으며 참고, 맞춰주고 이해하고 애쓰며 최선을 다해 꾸려가는 '그 한 사람'이 중심을 잡고 있는 덕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어머니 시대는 저보다 훨씬 더했지요. 어머니들께서 감당하신 인내와 수고 위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험난한 세월을 통해 그분들의 힘든 세월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지요.
저는 시골 오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좋게 말하면 다이어트 식품을, 좀 과장하면 소처럼 풀 뜯어 먹고 살던 인생이었지요. (자기비하 아니고 자기 발견)모태 베지테리언이라고나 할까요? 풀밭에 꽂혀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잘먹고 잘 사는 것, 행복가치관으로 똘똘 뭉쳐있었지요. 거기에다가 소처럼 방치되었던 탓에 애정결핍과 불안과 우울이 덧 씌워졌습니다.
저의 반전은 고진갑래의 결과로 믿음으로 하나된 가정을 되찾았고 평온과 행복도 따라왔습니다 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지만 저의 반전은 좀 달랐습니다.
물론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눈에 보이는 행복과는 다른 차원이었지요.
얼마 전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고등학교 시절에 제가 어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친구는 제가 쾌할하고 재미있는 친구였다고 했습니다. 음, 나쁘지 않군. 이후로도 저의 거짓된 자아는 얼마간 성격으로 굳어진 것도 있어서 잘 사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쾌할하고 재미있는 모습 뒤에 감추어진 우울한 감정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지요. 지질하고 우울한 내면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는 남편의 외도로 인한 고난이 왔을 때 걷잡을 수 없이 휘저어졌습니다. 불행을 남편 탓이라고 하며 미움과 원망의 감옥을 살았습니다.
제 힘으로 감옥을 빠져 나올 수가 없어 제가 믿는 하나님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게 왜 이런 시련이 왔을까요? 이 남편은 도대체 애 이럴까요? 저 사람을 올가맨 올가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저 남편의 모습은 코끼리의 다리일까요, 몸통일까요, 몸 전체일까요.
묻고 생각하고 공동체에서 나누며 해석이 되면서 새로운 세상이 조금씩 열렸습니다.
자기 발견을 하며 상대방의 입장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입장에서 보게 되니 남편도 저만큼이나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은 겁이 많고 유약한 사람입니다. 갑자기 맞닥뜨린 현실이 얼마나 버거웠을까요. 가장의 역할에 대한 부담과 외도로 인한 죄책감,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는 압박감으로 가뜩이나 힘든데 가족들에게 당하는 소외감까지 더해진 상태였으니, 사람 구실 하기 어려웠겠다 싶었지요.
매일 식구들 밥 차리고 돈 버느라 우울한 틈이 없는 환경이 저를 위한 최고의 보호임이 깨달아져 생색을 덜 내게 되었습니다. 돈 벌고 살림하고 아이들 돌보는 것이 훈장이 되어 생색의 창과 방패를 휘두르며 가족을 힘들게한 제 모습이 보여 입이 쑥 들어갔습니다.
의지처가 없는 환경에도 감사했습니다. 남편이 돈이 억수로 많고 친정이 부자여서 의지할 만 했으면 힘들게 가정을 지키며 버틸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남편에게 취할 것도 없고 의지할 친정도, 모아 놓은 돈도 없어서 다른 선택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는 환경이 꼭 나쁜 것 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제가 당하는 고난에 한 마음으로 공감해주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공동체와 내 편에서 응원하며 때로는 아빠 편에서 팩폭을 날려 주는 아들과 딸 덕분에 고난을 해석하며 내 모습과 남편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았습니다. 반전의 시작이었습니다.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뭍이 드러난 것처럼 모습을 드러낸 거짓자아에도 금이 갔습니다.
제가 맞은 반전으로 푸른 초장만을 바라는 소의 가치관이 깨어지고 분노와 미움 생색의 감옥에서도 자유로워 졌습니다. 뿐만아니라 지경이 넓어지고 세계가 확장되었지요.
저는 주일학교 고등부 교사입니다. 매주 주일예배 후 학생들과 일상을 얘기하는 나눔 시간이 있는데, 각자의 크고 작은 고난을 나눌 수 있는 귀한 시간이지요. 아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말 못한 고민과 고난이 많지요.
부모님과의 불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성적과 불투명한 진로, 우울과 무기력 등으로 힘들어 하지요. 때로는 학교에서 인간관계와 같은 힘듦으로 갈등하다가 자퇴를 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도 자퇴를 하고 무기력과 우울로 집안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반 모임에 온 친구를 만났습니다.
"00야 아침에 눈만 뜨면 막막하지?"
그말을 듣자마자 00는 그자리에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저의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얼마나 막막하고 불안했는지, 지질하고 우울한 속마음을 숨기고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으려고 어떻게 포장하고 살았는지 과감없이 들려 주었습니다. 저의 나눔에 00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도 자세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가 한 것은 저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해 준 것 밖에 없는데 00의 어두운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00는 매주 같은 이야기를 나눌 것이고 저는 맞아맞아 그렇구나 추임새를 넣으며 전심으로 들을 것입니다.
어른 들의 모임은 목장모임이라고 하는데 목장모임이야말로 진정한 고난 배틀의 장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한 가지 어려움은 있더라구요. 남편이 나이스하면 자녀가 애를 먹이고 그것도 아니면 물질에 어려움이 있다던가 하는. 아무 고난이 없는데 몸이 아픈게 고난인 사람도 있지요.
목장 리더인 저는 목원들의 고난의 종류와 단계에 맞춰 자동판매기처럼 제가 당했던 고난을 나눕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났는지를 덧붙이지요. 집단상담 집단치료가 따로없다고 느낄때도 있답니다
저의 소망은 저의 상처가 별이 되어 같은 힘듦을 겪는 사람들에게 가 닿는 것입니다. 그래서 딱 한 사람이 살아나기를 바라지요.
부족하지만 그 한 사람을 살리며 걸어가는 길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여정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