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깼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고 식탁에 놓인 잔에 물을 따른다. 발포비타민을 한 알 꺼내 퐁당 빠트린다. 아침에는 늘 발포 비타민을 하나씩 먹는다. 이것이 늘 벌어지는 내 아침의 시작이다. 물이 든 잔에 그를 떨어트리면 기포가 나며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서 점차 자신을 잃는다. 그러더니 컵 안을 자신 스스로 가득 메우는 것이다. 나는 시간이라는 비용을 지불하고 자그마한 탄산 쇼를 지켜본다. 그 대가로 한잔의 비타민을 얻는다. 내게 이것은 하나의 심플한 인생 공식이다. 그것은 기다림.
"나는 씹어먹는 비타민이 좋아"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다림의 미학을 모르던 사람. 그런 네 인생 공식은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낫다"였다. 물 한잔에 비타민이 녹는 시간도 기다리기 싫어하던 사람. 으적으적 씹어 먹고 꿀꺽 삼켜버리고는 활짝 웃어 보이던 사람.
그런 네게 나는 습관처럼 마시멜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여기 마시멜로가 하나 있어. 먹지 않고 기다리면 조금 있다가 하나를 더 줄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두 개를 먹기 위해서 하나를 유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 그것은 나를 위한 격언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연필로 데생하는 것을 특히 더 좋아했다. 하나의 선이 면이 되고 면이 모여 깊이가 된다. 그 하나하나를 그으며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과정. 그 끝에 얻어진 것은 기다림과 인내가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비타민을 씹어먹는 너는, 늘 내가 무언가를 그리고 있으면 달려와서 내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당겨야 하는 문을 늘 밀어 열었고, 성급히 달려가다 폐문에 부딪혔다. 에스컬레이터도 늘 걸어 올라갔고, 늘 저 정상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바쁜 일이 있어도 늘 내가 있는 곳으로 나를 보러 찾아왔다.
"보고 싶은 걸 어떡해"
그게 모든 과정을 무시하는 너의 부정할 수 없는 이유였다. 너는 한 마리의 작고 분주한 동물처럼. 눈이 오면 눈이 온다 내게 전화하고, 날이 좋으면 날이 좋다 내게 전화했고, 아무 일도 없다면 심심하다고 또 내게 달려왔다. 어차피 내일 만날 것을 알아도 당장 보고 싶다며 달려온 너는, 내일 세상이 망할 수도 있다는 온갖 이상한 이유를 대며, 자정 가까운 시간에 찾아왔다. 너는 문을 열자마자 내게 들어와 안겼다.
그 결과 너는 무단 외박으로 다음 날에도 나를 만날 수 없었지. 그때는 또 엄마 아빠가 밉다고 울면서 내게 전화했다. 그런 너를 달래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잊힌 나의 습관이다.
그런 내게 언젠가 너는 너무 냉정하다고 말했던가.
네게 별을 따다 주지는 못해도, 펄펄 끓는 너를 위해 그저 해열제 하나를 사다주고 싶었다. 삼십년 후에도 여전할 그런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던 저 먼 미래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할 너무나 많은 과정과, 고려해야 할 너무나 많은 절차들이 놓여 있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힘과 미래를 소망했다. 막차 걱정 없이 너를 눕힐 넓은 침대가 있기를 소망했고, 그 침대가 나의 침대가 아닌 우리의 침대이기를 소망했고, 그런 우리의 침대를 살 수 있는 미래를 소망했다. 나는 마시멜로가 너무나 많이 필요했고, 그것을 다 가지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개찰구에서 내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너를 보며, 나는 그리 생각했었다.
우리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서웠다. 그렇게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제대로 된 네 초상화 하나 그려본 적이 없었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다, 너는 너의 호기심을 좇아서 화실의 모든 곳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으니까. 그렇게 그려낸 네 얼굴은 모든 순간의 이미지들이 중첩된 내 상상 속의 모습이었다. 그 얼굴은 호기심 때문에 상자를 열어 버렸던, 이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재능을 받았다던 판도라의 얼굴을 닮아 있었고, 너는 자기와 하나도 닮지 않았다며 내게 푸념을 했던 거야.
어느 순간 나는 연필과 붓을 놓았고, 회계사 시험을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이제 그곳에 출근하기 위해서, 이렇게 물 한잔에 비타민 하나. 그리고 복잡하고 숨막히는 지하철을 타고 직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오빠. 기다리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집어 먹은 사람은 말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 그걸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몰라."
네가 마지막으로 내게 그 말을 했을 때는, 이미 기다려야 할 그런 마음조차 사라진 그런 날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따다 줄 수는 없어도, 삼십 년 후 너를 위해 해열제를 사서 달려갈 사랑을 주고 싶었다.
내가 그 삼십 년과, 사십 년의 마음을 지금 여기 한 순간에 모았다면, 네게 별을 따다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내가 미래를 위한 모든 계획과 나의 기다림을 지금 여기에 모으고 또 모아서, 늦은 밤 택시를 타고 네 집 앞으로 달려갔다면, 지금 너는 내 곁에 있을까. 지금의 내 마음을 미루고 미뤄서 미래의 무언가를 기다리던 나는 과연 무엇을 사랑했던 것일까.
이제와 의미 없는 그런 질문들.
그래도,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네가 막무가내로 나를 찾아와서 나무랐던 건 아냐. 다음 날 너를 더 오래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그리고 이제는 알아. 그런 너라서 멍청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내 옆에 앉을 수 있었던 거야. 이 세상 온갖 곳을 다 누비고 나서야, 나를 발견했던 거지. 그리고 그때 너는 다시 새로운 것들을 찾아서, 내 지루한 공간을 뒤로한 채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리고 내가 멀리 본 그 미래를, 나의 얇고 길었던 그 사랑을 나는 홀로 걸어가며,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너를 사랑할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그저 나만의 방식으로 너를 사랑한 것이라고.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었던 거라고.
따뜻한 바람이 문틈을 통해서 흘러 들었고, 선생님이 잠시 후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당신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시멜로 하나를 더 내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나는 하나를 집어 네게 주었다. 그런 나를 너는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나는 이제 배불러"
그리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활짝 열었다. 바람과 함께 눈부신 햇살이 들이쳤다. 너는 그 빛으로 스며들어, 다른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사라졌다.
그런 꿈을 꾸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