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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un 20. 2021

소서(小暑), 맥주 거품처럼 피어나는 청춘의 풍경

절기의 일기, 소서(小暑)

   24절기 중 11번째 절기, 소서(小暑).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때이다. 싱그러운 여름이 계절의 곳곳을 채우는 시절이다. 우렁찬 매미 소리가 장마를 마무리 짓고, 여름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여 절기가 더욱 실감 나는 때이다. 밀과 보리를 먹을 수 있게 되는 시기인데, 나의 20대 가장 푸르른 시절도 맥주(麥酒)와 함께 했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맥주 거품을 보며 내 인생의 앞날이 하얗게 가려지는 기분이 들곤 했던, 소서의 시절이 있었다.


소서





   "계속 이랬잖아."

   친구에게 늘 밥을 얻어먹다가 유난히 미안했던 날 친구에게 말한 것이다. 매번 이렇게 밥 사줘서 고맙다고. 그러자, '무얼'이나 '괜찮아' 같은 말을 할 줄 알았던 친구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제야 그걸 말하냐는 표정과 눈빛. 금방 얼굴에서 걷어내더니 카페로 가서 역시나 커피를 사 주었다. 그날 카페에서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이 난다. 기자의 꿈을 버리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기자 준비를 한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를 하겠다며 돌아다녔다.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다. 그러나 공부'만' 했다. 친구를 만나거나 미술관을 가거나 영화관을 갈 때면 여지없이 인출기에서 엄마 통장의 계좌번호를 누르곤 했다. 잔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3만 원을 인출했고, 10만 원도 없으면 만원을 뽑았다. '나중에 다 갚을게'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렇게 엄마의 고혈을 길바닥에 뿌리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통장에 27830원이 있는 걸 보았다. 잠시 고민하다 친구에게 몸이 안 좋다고 문자를 하고는 좀 걸었다. 안양천을 걸으며 '27830'을 계속 생각했다. 우리 가족의 먹거리가 그 안에서 해결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울고 싶었는데 눈물은 나지 않았다. 어찌 됐든 나의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현실감각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이어서, 무조건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더 하고픈 공부가 있어서 바로 취업보다는 또 다른 전공과 대학을 선택했다. 4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모든 걸 내려두었다. 무겁게 짓눌러 오던 취업의 압박에서 벗어나니 일단은 홀가분했다. 무엇보다 돈을 벌고 싶었다. 태어나서 내 손으로 제대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다. 집 앞 호프집에 '아르바이트 구함'이 일주일째 붙어있었다. 그래, 자본의 노예가 되어보는 거야. 몸으로 때워서 돈 벌어보자, 엄마 계좌번호 따위 깔끔하게 잊어 보자.

   기말고사가 끝난 6월 그렇게 첫 발을 디뎠다.



   오후 5시 오픈에 맞춰 문을 열고 테이블을 닦고 테이블마다 수저통과 휴지통을 채우고 청소를 하며 아르바이트 일과가 시작했다. 주방 담당이 와서 함께 간단하게 밥을 먹으면 6시가 되었고 손님들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했다. 술을 하지 못하는 내가 술을 날라야 했다. 내가 술을 못하는 건 상관이 없었다. 소주와 맥주 종류, 사케의 이름을 외웠고 술마다 어울리는 안주류를 배웠다. 포스 찍는 방법도 배웠고, 메뉴의 가격도 거의 익혔다.

   가장 배우기 어려웠던 것은, 생맥주의 거품을 잡는 것이었다. 시원하게 얼린 맥주 500잔에 가장 보기 좋고 맛도 좋은 거품 양은 성인 엄지손가락 반 마디 정도였다. 그 정도 거품을 내기 위해, 맥주 꼭지(라고 불렀었다)의 세기를 잘 조절하며 맥주컵의 기울기를 신경 써야 했다. 대부분은 거품이 넘쳐흘렀다. 조심히 하면 거품이 너무 없어 탈이었다. 거품 양 때문에 자주 사장님께 혼나고 꿀밤을 맞았다. 그것도 제대로 못 하고 그동안 뭐했냐. 그러게요. 그동안 뭐했을까요. 지난주까지만 해도 부동산 정책과 환율 시세 변동을 체크하고 시사상식을 공부하고 영국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의 만남의 의미에 대해 토론했는데, 다 쓸모없네요.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고 말이죠.

   매일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실감했다. 가끔 손님 없을 때 신문을 뒤적이다가 사장님께 벼락같이 혼나곤 했다. 그 시간에 수저를 닦고 메뉴를 공부해! 자꾸만 신문이 보고 싶고 글이 쓰고 싶었지만, 내가 발 디디는 곳은 호프집 포스기 앞이었고 내 손에는 맥주잔이 여섯 개씩 들려 있곤 했다.

   적응하기 힘든 호프집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음악'이었다. 음악 선택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었다. '최신 음악 100'을 다운로드하는 것이 다 이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내 취향으로 고를 수 있었다. 버즈와 SG워너비와 씨야의 음악을 자주 틀었다. 가끔 터보와 영턱스 같은 노래를 틀면, 사장님은 싫어했지만 손님들은 좋아했다. 오늘은 무슨 음악을 틀을까, 라는 생각하면 일 나가는 마음의 무게가 덜어지곤 했다. 그렇게 호프집 아르바이트에 조금씩 적응하며, 내 생의 24번째 소서(小暑)를 보내고 있었다.  


   8시쯤이 넘어서면 취기가 오르는 손님들이 생긴다. 나는 결코 예쁘지 않았으나, 취기 오른 이들에게 붉은 가게 조명이면 아르바이트생이 조금은 예뻐 보이기도 했나 보다. 몇몇이 연락처를 물어오곤 했다. 처음엔 난감했으나 '전화 안 받지 뭐' 하는 마음으로 번호를 적어주곤 했다. 새벽 3시 마감 청소 때 자리에 떨어진 나의 번호 쪽지를 보고는, 다음부터는 연락처를 묻는 이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적어 주었다. 취한 자들의 잠깐의 호기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내일이 되면 '이건 뭐지?' 하며 버려질 쪽지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연락을 해오는 이들도 있었으나, '실례지만 누구시죠'라는 말을 많이 했다. 잘못 거신 번호라고 하면, 다들 어설픈 기억력의 끝에서 헤매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곤 했다. 한두 명이 기억하고 몇 차례 연락해오는 경우가 있었으나 대부분 잠깐의 호감에서 끝나곤 했다. 첨에는 나쁜 놈들, 싶었으나, 갈수록 알게 되었다. 나쁜 건 그들이 아니고 술이라는 것을.

   한 손님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늘 오픈과 동시인 5시쯤 오셨다. 안경을 끼고 세미 정장을 입고 다녔다. 1번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시켰다. 어떤 때는 오징어 땅콩을 시키고 어떤 때는 짬뽕탕을, 어떤 때는 오코노미야키를 시켰다. 혼자 먹기엔 많은 양인데도 7시나 8시까지 맥주를 3~4잔을 더 드시고 가곤 했다. 혼자였다. 거의 매일이었다. 백수인 건가, 이혼 과정 중인가, 혼자 먹으면 맛있나, 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은 주문을 다 받고 나니 한 마디 덧붙인다.

   "저기.. 몇 살이에요?"

   "아.. 돼지띠인데요."

   "그렇게 말하면 몰라요."

   "24살이에요."

   "그렇구나... 나는 몇 살 같아 보여요?"

   생각지 못한 질문이 훅 들어왔다.

   "... 삼십 대 중후반처럼 보이세요."

   훗, 하고 웃었다. 뭐지. 포스에 입력을 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물어 온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어? 제 나이 물어보고는, 자기 몇 살 같아 보이냐고 하던데요. 뭐라고 그랬어? 삼십 대 중후반요. 아!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장 세게 맞은 꿀밤이었다. 야이 씨! 20대이신 것 같다고 해야지! 어이구, 맹충아. 눈치도 없고. 너 맘에 들어하는 거잖아!

   날? 왜? 한낱 호프집 아르바이트에 예쁘지도 않은 날 왜? 그나저나 그렇게 세게 때리면 아프잖아요. 눈치를 키우게 아르바이트비를 더 주시던가요. 그날 그분은 유난히 오래 앉아 계셨고 그 후 한동안 오지 않았다. 사장님은 단골 다시 데리고 오라고 나에게 장난 같이 진심으로 말했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게나 남자에 관심도 없었고 남자를 몰랐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그분은 처음으로 친구를 데리고 왔다. 왁자지껄 떠들고 웃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와,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유난히 손님이 없는 날이어서 그 테이블이 좀 더 시끄럽게 느껴졌다. 30대 중후반처럼 보이는 그분이 잠깐 자리를 비우자, 친구가 나에게 손짓을 했다.

   "저 친구가 그쪽 진짜 많이 좋아하거든요. 근데 말도 못 하고 저러고 있는데, 오늘 보여주고 싶다 해서 따라와 봤어요. 저 친구 잘 좀 대해 주세요."

   이 둘이 어쩜 친구가 되었지 싶을 정도로 말을 잘했다. 그랬구나, 근데 뭘 어떻게 잘해줘야 하는 거지. 단골손님이 돌아왔다. 둘은 다시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 계산을 할 때 단골손님이 계산을 하고 내가 카드를 받았는데, 별 말이 없었다. 나도 평소처럼 계산을 하고 카드를 돌려주었다. 그렇게 나가고는 다시는 오지 않았다. 마지막 친구와의 방문이 무슨 의미인 건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다.




   나의 선임인 남자아이는 동갑이었다. 병장 제대하고 당장 돈을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경찰이 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으나,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는 문자를 몇 번 주고받았다. 

 내가 오픈을 맡았고, 마감을 맡은 남자아이는 스무 살이었다. 집에 돈이 없어 대학을 못 보내줬는데요, 별로 가고 싶지도 않았어요, 라며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하던 놈이었다. 키가 크고 잘 생겼으나 삐쩍 말라서 맥주 짝도 잘 들지 못해 내가 나르곤 했다. 그만그만한 삶을 사는 전형적인 소시민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들 중에 내가 가장 소시민이었으나, 정신만은 아니라고 유치한 핑계를 매일 대고 있었다. 단 한 발자국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였으면서 그렇게 스스로를 둘러대고 속이고 있었다. 나는 너희와는, 하여튼 달라.

   멀끔한 아이들이 들어올 때면, 괜히 신분증 검사를 한다. 누가 봐도 20살이 훌쩍 넘었으나 그들의 정확한 나이가 괜스레 궁금해지는 거다. 신분증 검사를 하면 백이면 백 좋아했다. 그들도 웃으며 신분증을 꺼냈다. 시콰고 유니벌시티, 조지브라운컬리지. 그들과 나의 집이 목동이라는 것을 빼면, 그들과 나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신분'이라는 단어도 떠올랐다. 예수님이 탄생하고 2000년이 훌쩍 지났는데 신분이라니. 그러나 그때만큼은 너무나도 강한 힘으로 나를 눌렀다. 누구는 방학에 잠시 한국에 들어와 맥주 한 잔 하고, 누구는 그들에게 맥주를 대령하고 매일 맥주잔을 100잔씩 설거지했다. 그럴 때면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아르바이트하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너희와 결국은 같구나.  



   내 20대 중반을 바친 호프집을 생각하면, 뿌연 시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맥주 거품도 뿌옇게 일었고, 가게 안도 늘 흐릿했다. 담배 연기였다. 여름엔 에어컨, 겨울엔 히터를 틀어야 해서 창문을 열지 못했다.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가끔 포탄이 떨어진 전쟁터가 이러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전쟁터에서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집에 오면 새벽 세네시였다. 내 온몸에 담배연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담배연기를 심고 왔다. 눈이 따갑고 켈록거렸으나,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여름 내내 이 냄새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한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서글퍼지려 할 때마다, 씻지도 않고 컴퓨터를 켰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의 핑계를 내세우고는 싸이월드를 돌아다녔다. 외로웠다. 은행에 취업이 되거나 여의도 회사에 면접을 보고 왔다는 친구들의 싸이는 굳이 가지 않았다. 내 담배 냄새가 더 짙게 올라오는 것 같아서였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그대로 누워 잠이 들고 오후 한두 시에 일어났다. 빈둥대다가 5시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행주를 빨아 테이블을 닦고 수저통을 채우고 냅킨을 채워 넣었다. 어느 날은 눈물이 나고 어느 날은 기분이 괜찮았다.






   여름 방학이 끝날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겨울방학이 시작될 즈음 사장님께 연락이 또 왔다. 그렇게 여름과 겨울을 담배연기 자욱한 곳에서 보냈다. 자주 나의 건강과 아르바이트비를 바꾼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와서 보면 어쭙잖은 생각이지만, 아르바이트 내내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렸다. 사장님의 태도나 손님들의 눈빛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이보다 훨씬 못한 아르바이트도 많고 좋은 손님이 더 많았으나 내가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는 그것이었다. 인정해야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디서건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곳에서는 기본적인 '인간성의 상실'이 정도의 차이를 지니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사실 인간성의 상실은, 사장님 스스로가 구현해 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지켜본 1년 이상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아파도 잠을 안 자고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가게에 나왔다. 호텔 주방장 출신이었던 그는 주방 담당이 쉬는 날이나 도망친 날이면 주방을 지켰다. 물 묻은 손으로 포스를 만지다 전기가 지릿한 적도 있었다. '하루 쉬면 얼마를 까먹는 줄 알아'를 입에 달고 사는 그였다. 일 매출 200만 원을 넘겨도 단 만원도 수고비를 주지 않았다. 그의 잃어버린 인간성이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의 인간성 회복이 가능하긴 할까, 라는 생각이 아르바이트를 할수록 짙어졌다.


   내게 처음으로 자본과 인간성의 관계에 대해 실감하게 해 준 그곳을 몇 년 전 지나칠 일이 있었는데, 외형이 아주 다른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반찬가게였었던가, 기억이 잘은 나지 않지만 호프집은 아니었다. 사장님은 무얼 하고 있을까. 그저, 쉬는 날 챙겨서 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식이 그에게 인간성 회복의 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즈음이었다.







   몇몇 아르바이트를 해 보았으나 이 시절의 호프집이 유난히 기억에 많이 남아있다. 토사물을 치우고 컵이 깨져 손이 베이고 사장님과 손님들에게 욕지거리를 들으며, 나는 조금씩 표정을 얼굴 뒤로 욱여넣는 방법을 배웠다. 결혼 전까지 모든 일을 그러한 자세로 대했다. 일터에서는 마치, '나의 아저씨' 지안처럼 무표정하게 있었다. 최대한 나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무존재. 

  그래서 더욱 열심히 살았다. 나의 24시간 중 8-9시간을 자본에 바쳤으니, 나머지 시간은 나를 위해 살아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하고픈 것을 좇으며 지냈다. 아직도 내가 지인들에게 '쉬엄쉬엄해', '너무 애쓰지 마', '천천히 해', 무리하지 마' 같은 말을 자주 듣는 까닭이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맥주 거품 속에서 여름의 더위를 온몸으로 받아내던 때가 있었다. 희뿌연 담배연기 속에서 내 미래의 방향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실패한 시간들이, 여전히 내 영혼의 역사에 새겨져 있다. 그 시간의 여파는 내 생을 자주 흔든다. 누워 있거나 하늘을 보는 순간이면 '이 시간에 무얼 해야 할까'라고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대답은 늘 흐릿하다. 꿈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또는 꿈을 만들지 않는 나를 자꾸 죄인으로 몰아세웠다. 육아의 형무소에 갇혀서도 내내 그 질문을 받아내느라 지겹고 힘겨웠다.


   다행이다. 올해의 소서에는 그 질문에 또렷한 답이 있을 것만 같다. 누워 있거나 하늘을 보는 순간에, 순간의 영감을 잡아다 글로 재생시킬 것만 같다. 추억의 끝자락에 걸려있는 장면들을 활자로 나열하고 재배치하며 지내고 있을 것만 같다. 글 쓰는 이들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만 같다. 담배와 술을 하지 않았으나 담배 냄새와 술잔에 파묻혀 있었던 청춘의 소서(小暑)를 복기하며, 그래도 여전히 청춘이어서 아름다웠다고 쓰고 있는 지금처럼 말이다.



   

*절기 설명은 '네이버 지식백과'를 참조하였습니다.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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