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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Nov 07. 2020

첫째 딸 두 번 키우기

첫째를 꼭 닮은 셋째를 보며 

종교는 없다. 굳이 따지자면, 무신론자에 가깝다. 그러나 '하늘이 주신'이나 '자연의 섭리'같은 표현을 자주 쓴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커다란 힘은 믿는다. 이렇게 쓰고 보니 유신론자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듯도 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하늘이 또는 자연의 섭리가' 내게 막내를 준 이유를 이제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가족여행계를 하는 모임의 한 언니가 한 말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첫째 키울 때는 힘들어서 예쁜 줄도 몰랐어."


   그때 나는 아이를 하나 키우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강조되었던 말은 '힘들어서'였다. 30년 넘게 비혼 주의자로 살아온, 육아 따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내게 던져진 육아는 내 삶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매일을 산더미 같은 고통과 마주하며 그 고통을 겨우 헤쳐나가는 나날이었다. 오늘의 고통이 어마어마했는데 초인적인 힘으로 그 고통을 이겨내고 잠이 들면 그다음 날은 더 어마어마한 고통을 마주하는 식이었다. 나에게 육아는 우주적 차원의 일이었다. '힘들다'라는 어휘 하나로 가득 찬 시기였다. 

   저 말이 다시 떠오른 때는, 둘째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고서였다. 둘째는 첫째에 비해 예뻤다. 객관적으로도 예뻤다. 첫째는 아무리 봐도 못생긴 아이였다. 엄마인 나도 정 붙이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이렇게나 못생긴 게 내 아이라니.... 못생긴 아이가 무겁기만 하고 예민하고 고집도 세고 힘도 세고 우는 목청도 크고... 육아의 힘든 모든 조건을 갖췄다. 그런 아이를 키우다 둘째를 키우니, 육아 천국이었다. 예쁜데 순하고 목청도 언니 같지 않다. 많이 울지도 않는다. 더 예뻐 보인다. 그렇게 예쁜 아이를 키우면서, 첫째는 도대체 왜 그리 못났던 걸까 돌아보게 되었다. 첫째의 어린 시절 사진을 찾아보고 흠칫 놀랐다. 내 기억과 많이 다르다. 꽤나 귀엽고 볼이 통통한 아이였다. 그제야 육아 선배 언니의 말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첫째 키울 때는 힘들어서 예쁜 줄도 몰랐어."


   둘째를 키워보니 강조되는 말은 '힘들어서 예쁜 줄도 몰랐어'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첫째도 예쁜 아이였다.(물론 객관적으로 둘째만큼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서툰 첫째 엄마인 내게 육아가 너무나도 거대했기에, 육아에 파묻혀버리는 바람에 내 아이를 예쁘게 볼 마음의 공간이 없었다. 분명히 미소가 예쁘고 애교가 많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나, 나는 그 아이를 키워내기에 급급했다. 하루에 15분 예쁘고 나머지 깨어있는 모든 순간 아이에 시달렸다. 기질이 예민한 아이는 엄마에 붙어있으려 했고, 아이를 잘 달래거나 케어하지 못하는 육아 빵점 엄마는 아이를 짐스럽게만 여겼다. 


   첫째의 아기 시절 사진을 보면서, 육아의 피곤보다 더 거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 미안함에 쓸려가는 감정들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자지 않는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고, 잠에서 깬 아이를 억지로 재워 보려 계속 먹이기만 했다. 너무 많이 먹은 아이는 토하고 게워냈지만 그런 아이에게 또 짜증만 내었다. 도대체가 엄마로서는 바닥인 나에게, 사진 속 첫째는 어쩜 이리도 예쁘게 웃어주었을까. 어쩜 이리 많이 웃어주었을까. 내리사랑 따위, 치사랑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나는 첫째를 키우는 모든 순간, 사랑받고 있었다. 그 사랑을 철저히 외면한 채 주문걸 듯 '빨리 커버려라'만 읊조렸다.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들에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셋째가 태어났다.

옛말은 틀린 말 하나 없다더니, 이 말도 틀리지 않았다.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더니, 정말이다. 이렇게나 예쁘니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가는 게 당연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또 봐도 예쁘다.(전지적 엄마 시점이지만, 정말 객관적으로도 셋 중에 가장 예쁘다.) 그런데 문제는, 첫째랑 똑같이 생겼다. 첫째랑 판박이, 붕어빵, 쌍둥이 모든 형용사를 다 갖다 붙여도 부족할 만큼 똑같다. 거대한 모순이다. 첫째랑 똑같은데, 예쁘다니. 첫째는 세상 못났는데, 막내는 참으로 예쁜데, 둘이 똑같다니. 

   여기서 '하늘'이나 '자연의 섭리'같은 단어가 다시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하늘은-자연의 위대한 섭리는- 내게 첫째를 다시 키워보라고 막내를 보내준 것이다. 첫째를 키우면서 보지 못했던, 느끼지 못했던 그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다시 보라고 셋째를 보내주었다. 이제 어느 정도 육아에 익숙해진 내게, 여유 속에서 아기 때 첫째의 사랑스러움을 다시 느껴보라고 막내가 내게 왔다. 막내의 웃는 모습에 자주 놀란다. 첫째의 모습이 비쳐서. 막내의 고집 피우는 모습에 웃음이 난다. 그래, 첫째도 저런 표정이었어, 나는 그저 짜증만 나서 귀엽움을 보지 못했지. 막내의 자는 얼굴에 4년 전 첫째가 들어있다. 감사함에, 눈에서 물이 툭 떨어진다.  참 다행이다, 막내를 낳아 키우게 돼서. 덕분에 다시는 보지 못했을 첫째의 아기 모습을 고스란히, 그것도 매일 매 순간 보고 느끼고 어루만지고 있다. 

   서로를 알아봐서인지 첫째와 셋째는 잘 어울린다. 다행히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둘째 덕분에 첫째와 셋째는 찰떡이다. 첫째는 막내만 보면 '귀여워~'를 외치고, 막내는 큰언니만 보면 좋아서 소리 지르고 다다다다 기어가 안아 달라고 팔을 벌린다. 똑같이 생긴 것들끼리 자알~ 논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하늘이 내게 이런 이유로 막내를 주셨구나' 자연스레 종교인의 심성을 갖게 된다. 그 뿌듯함은 종교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된다.  




   막내 임신 사실을 안 그날부터 연달아 4일을 울었다. 생각지 못한 임신에,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흘렀다. 두 달만 더 버티면 둘째를 어린이집 보낸다는 희망 하나 붙잡고 지내고 있었는데, 지긋지긋한 육아의 끝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는데 셋째를 임신했다. 세상 모든 원망을 끌어다 하고 있었다. 임신 기간 내내 울적했다. 그렇게 열 달을 보내고 아이를 낳아 14개월째 키워내고 있다. 이제는 막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얼마 전 드라마의 한 대사가 유난히 깊이 들어왔다. 


    "인생은 등가야."


    그렇다. 막내가 내게 온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엄청난 육아의 고통에 대한 분명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만큼의 '인내'와 '희생'을 배울 것이다. 그만큼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 정제되는 인격을 갖게 될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느끼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이 더 늘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첫째의 영아기를 다시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나는 선물처럼 내게 온 막내의 웃음을 보며, 종교만큼 감사한 육아를 할 것이다.


   정말이지 인생은, 정확히 등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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