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샤 Nov 27. 2020

자라지 못한 7살을 놓아주려 한다

   인생에 있어 몇몇 장면은 너무나도 깊게 각인되어 언제 떠올려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난다. 내게 7살의 그 날이 그런 순간 중 하나이다.     


  봄의 끝자락이었던 듯하다. 아직은 긴 팔 셔츠를 입고 있었고, 7살의 나는 가난을 그려놓은 듯한 집 앞에서 혼자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오는 골목은 너무나도 좁아 한 사람만 왔다 갔다 할 수 있었고, 집 뒤로는 탄광으로 가는 산길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었다. 골목길의 끝, 오르막길의 시작점에 우리 가족의 셋집이 있었다.

  마른 흙을 쌓고 무너뜨리고 다시 쌓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미용학원 강사로 나가 돈을 벌었다. 아빠는 어째 집에 있었는데, 그 무렵 한약재 냄새가 집에 가득했었던 기억으로 보면 아빠는 어딘가 아팠다.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늘 어딘가 아프다고 했다. 그런 아빠도 외출하고 없었다. 유치원도 가지 않고 친구도 없는 나는 흙을 만지거나 잎을 따거나 오르막길을 오르고 내려오고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빠가 골목 끝에서부터 나타난다. 반 팔 옷을 입고 있었다. 오른손에 작은 검은 봉지를 들고 땅을 보며 걸어오신다. 7살의 나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아빠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처진 어깨는 삶의 모든 무게를 지고 있는 것 같았다. 땅을 보는 아빠의 시선은, 땅속 검은 슬픔을 보는 듯했다. 검은 비닐봉지의 흔들거림은, 바람 속에 가난을 흩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총체적인 슬픔이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존재 그 자체로의 슬픔’이었다. 7살 여자아이 역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당황스럽고 먹먹했다. 아빠가 끌고 오는 슬픔의 거대함에 그만 눈물이 흘렀다. 줄줄. 참는다고 참을 수 있는 그런 눈물이 아니었다. 하염없이 흘렀고, 아빠가 보기 전에 닦아내야 했지만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도대체 그건, 무슨 종류의 슬픔이었던 것일까.

  아빠가 이쪽으로 거의 다 왔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내 이름을 부른다. 울음 범벅이 된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주위에는 사람 하나 없고, 그저 바닥의 흙뿐이다. 어디 다쳤거나 아파 보이지도 않는 딸이, 눈물 콧물이 범벅이다.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왜 울어?”

  몇 번을 물으셨지만, 나는 그저 울었다. 아빠가 불쌍해서, 아빠가 들고 오는 비닐봉지가 너무나도 가난해 보여서, 아빠가 슬퍼 보여서. 도저히 이렇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몇 번이나 더 물었지만 그럴수록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더는 대답을 독촉할 수 없었던 아빠는, 딸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아빠 품에서 한참을 더 울고 나서, 아빠의 비닐봉지 안에 꽈배기가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설탕이 듬성듬성 묻은 꽈배기 네 개. 어린 딸과 먹으려고 아빠가 사 온 꽈배기에 묻어있는 소박함이, 7살짜리 딸은 무어 그리 서글펐던 걸까. 지금까지의 나도 이해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매번 그때의 아빠를 떠올리면, 비슷한 감정들이 함께 떠오른다. 비닐봉지가 풍기는 빈곤, 처연한 어깨, 괜스레 터덜터덜 느껴진 걸음, 고개 숙인 얼굴에 숨긴 알 듯한 표정. 결국 나는 대답 없이 그 꽈배기를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목이 턱턱 메었지만,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아빠가 준 꽈배기를 다 먹었다.       


  평범한 10대를 지나 남들처럼 20살에 대학을 갔다. 열정 넘치고 할 일도 많았던 20대의 시간을 겪고, 30대에 들어섰다. 여전히 삶은 서글펐다. 수입이 없는 대학 시절, 친구를 만나기 위해 엄마의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려 보니 잔액이 3만 원이었다. 친구에게 급하게 일이 생겼다고 하고, 하염없이 걷다가 집으로 들어간 적이 몇 번 있었다. 대학 졸업 후 학자금은 매월 상환해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담배 연기 자욱한 아르바이트는 시급이 많아 그만둘 수 없었다.  

  인생의 중간중간, 가끔 7살의 그 날이 떠올랐다. 아빠가 유난히 서글퍼 보이는 얼굴이거나, 주전부리로 꽈배기를 사 오시는 날은 여지없이 나는 7살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애써 부정했다. 삶은 여전히 가난했고 내 안의 쓸데없는 성숙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며, 아빠는 그저 늙어갈 뿐이었다.      

  

   30살 가을에 만난 지금의 남편과 31살 봄에 결혼식을 치르기로 했다. 5월의 어느 날, 저녁밥을 먹고 티브이를 보던 평범한 밤이었다. 아빠가 문득 이름을 부르신다.

  “너 혹시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너 학교 들어가기 전에 그 대식이네 옆 집 살았던 거 기억나나? 그 집에 살 때 아빠가 과자 사서 오는데 너 혼자 놀고 있었어. 아빠가 보니까 엄청 울고 있는 거야. 그때 왜 울었는지 혹시 기억나나?”     


  아빠는 나와 똑같으셨다. 아빠에게도 그날은 인생의 잊을 수 없는 몇몇 날 중에 하루였던 것이다. 그날의 그 모든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순간, 또 한 번 울 뻔했다. 인생은 도대체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결정해야 했다. 진실을 말할지, 다시 7살의 나로 돌아갈지.  

    

  “울었던 거는 기억나요. 그런데 왜 울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왜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진실을 말하면 아빠가 믿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빠가 불쌍하고 슬퍼 보여서요. 아빠 왜 땅을 보며 꽈배기를 사 온 건가요. 왜 하필 꽈배기를 사 와서 가난을 통째로 드러냈나요. 왜 저는 그리도 서럽게 아빠가 보였을까요. 그래서 눈물이 났어요. 한 번 눈물이 나니 멈출 수가 없었어요.      


  어린 나는 일찍이 ‘가난이 주는 서글픔’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젊은 엄마는 가장이었다. 엄마는 돈을 벌어오고 저녁밥을 같이 먹는 사람이었다. 옆집 대식이네가 우리 집주인이었는데, 가끔 놀러 가면 우리 집보다 훨씬 컸다. 방이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 네 식구의 공간은 부엌과 방 한 칸이 전부였다. 밤마다 엄마의 눈물 섞인 한탄과 아빠의 한숨 섞인 침묵의 대답을 나는 고스란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날도 엄마는 나갔고 아빠는 한약재를 달이거나 나에게 밥을 먹였다. 그날 밤도 또 엄마는 화난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아빠는 한 두 마디 대답하시고는 컴컴한 밖에 나갔다 들어오시곤 했다. 나는 그 눈물과 한숨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슴에 두었다. 어린 동생은 잘만 잤지만, 7살은 어른들의 대부분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나이이다.

  옆집 대식이 사촌 지영이가 미미인형을 가지고 놀러 오는 날이면, 만져보고 싶다는 말도 못 했다. 나처럼 가난한 아이는 그런 인형을 만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난은 7살 여자아이를 가득 삼키고 있었다. 부모님의 대화를 잊으려 노력하거나 수다로 떨쳐버리거나 모르는 척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그런 나날이 차곡차곡 마음에 쌓이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꽈배기를 사 오신 그날은.       

  

  마흔이 다 되어가는 지금, 7살의 그 날을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 간다. 친정은 여전히 가난을 이고 있지만, 내가 꾸린 가정은 그보다는 풍요롭다. 나의 여섯 살 첫째 딸은 나의 여섯 살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사고 싶은 것을 산타 할아버지께 기도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생일과 어린이날은 모두 원하는 선물을 받는 날이다. 먹고 싶은 것 먹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며 자란다. 엄마의 눈물과 아빠의 탄식 없이 자란다. 이만하면 나도 7살 그날의 나를 보내줘도 될 것 같다.

  내후년이면 아빠는 만 일흔이 되신다. 생이 저무는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더 늦으면 내 안의 7살이 평생을 울고 있을 것만 같다. 언제 말씀드릴 수 있을까. 아빠가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시긴 할까. 사실을 말씀드리면 받아들일 수 있으실까. 7살이 본 슬픔의 바닥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여전히 망설여지긴 하지만, 부여잡고 있기엔 인생은 너무 빠르고 의미 없이 흘러간다.      


  “아빠, 그날은 아빠가 조금은 초라해 보여서 울었어요. 터덜터덜 걸어오는 아빠가 힘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싫어서 울었어요.”


  이 정도면 수긍하실 수 있으실까.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내가 그때의 아빠의 나이이다. 철 지난 고백을 하기 딱 좋은 나이이다. 다가오는 추석에 얼굴을 뵈면 용기를 내 봐야겠다. 7살이 될 딸을 옆에 두고 7살의 내가 되어 그날의 아빠에게. 생의 서글픔이 더 이상 내 안에서 방황하지 않게. 아빠의 오랜 의문이 더 이상 삶의 구석에서 남아 있지 않게.      



       









https://brunch.co.kr/@1kmhkmh1/40


매거진의 이전글 목숨 걸고 순댓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