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길 포기?!
첫째 날 36km를 교훈 삼아
둘째 날은 원래의 목적지에서 한 마을 덜 가서
도착하는 루트로 변경했다.
fao라는 곳인데 이 지역은 순례길의 주인공(?)인
야고보의 유해가 떠오른 곳이기도 하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그렇게 숙소에서 나와 둘째 날의 여정을
힘차게 시작! 하자마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줄기,,
이 비가 순례길 내내 계속될 줄은
이땐 몰랐더랬지,,
그래도 다행인 건 거센 비가 아니라
오다 말다 하는 비라서
가볍게 보온도 할 겸 우비를 입고 출발했다.
어제 오래 걸어서 발목에 벌써! 무리가 왔다.
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 발목 보호대도 샀다.
그렇게 내리다 말다 하는 비를 맞으며
해안가를 따라 열심히 걷는데
내리다 말다 한 비가 이제 계속 내리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아침은 대충 간단하게 먹고 나왔고
간식이라고 챙겨 온 건 오레오 한 봉지와 물 한병.
조금씩 먹으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비는 점점 더 거세져 우비마저 젖기 시작했다.
그래도 좋았다.
왜냐면 어린 시절 비 맞으면서 놀았던 기억이 떠올라서
이렇게 비를 맞아보네~ 하면서 걸었는데
내 눈앞에 이런 광경이 펼쳐졌다.
사진으로 봐서는 그냥 데크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기껏해야 사람 1.5명 정도 지나갈 수 있는 길이다.
성인 두 명이 함께 지나가기엔 살짝 좁고
성인 한 명, 아이 한 명 이렇게 지나가면
딱 알맞은 그런 너비.
어제도 이런 데크길이 종종 있었기에
오늘도 가다가 다시 해안길 나오겠지. 싶었는데
해안길은 이제 끝나버렸다. 난 시작도 안 해봤는데.
해안길은 둘째 날 시작 초입(위 사진)이 끝이었고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거다.
오케이. 그래도 일단 킵 고잉 가보자! 하며
서로를 다독이면서 걸었는데
점점 서로 격차가 벌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길이 좁기 때문에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빨리 걸어 뒷사람과 격차를 벌려
뒷사람이 오기 전까지 쉬는 것이었다.
그렇게 빗속에서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짬짬이 휴식을 보내면서
데크길을 걸었다. 한 7km 정도 걸었나?
드디어 데크길이 끝나는 지점이 보였고
오레오 한 봉지로 점심까지 버티던 우리는
‘곧 식당이 나오겠지?’하는 기대감과
‘밥 먹는 동안 쉴 수 있겠다.’하는 안도감을 내비쳤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순례길을
다 파악하지 못했나 보다.
데크길이 끝나자마자
그 유명한 유럽의 돌 길이 시작됐다.
가뜩이나 발도 아프고, 비 와서 춥고, 배고픈데
돌 길이라니, 돌 길이라니!!!
정말 돌길을 한 10km 정도 걸었나?
걸으면서 “으아아아악!!!!!”소리도 지르고
에라 모르겠다 달려도 보고
미친 사람처럼 웃어도 보고 하면서
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데크길과 돌길을
어떻게든 걸어가 보려고 무진장 애썼다.
진짜 제일 힘들었던 건 어디 엉덩이 기댈
나무나 바위마저도 없었다는 게
정말 진짜 너무나 힘들었다.
버티다 버티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자니
외국 여자분이 와서 괜찮냐며 물을 건네줬는데
물은 나도 가지고 있어서 정중히 거절하고
지친 와중에도 나를 걱정해 준 여자분이 고마워
사회생활로 다져진 사회적 미소를 뽐내며
“부엔 까미노~!”를 외쳤다.
언니랑 다시 합류하고 돌 길을 걷고 또 걸으니
오후 4시경 드디어,,, 드디어,,,,
fao 마을의 초입이 보였다.
아침은 간단하게 때우고 오늘 걸은 길에는
마트나 가게, 가판마저 없었기에
오레오 한 봉지에 의존해 쫄쫄 굶었던 상태였기에
마을 초입이 보이자마자 폭풍 검색을 통해
식당을 찾아갔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와서 대부분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숙소 가서 몸 좀 녹이자 싶어
숙소로 향하는 길에
카페 한 곳을 발견했다.
카페라 음식을 판매하지는 않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앉아서 먹을 수 있는 무언가만 있으면 됐다.
카페에 들어가서 따뜻한 차 한잔 시키고
케이크랑 무슨 전통 빵? 같은 걸 시켜서
한숨 돌리니 그제야 잔과 그릇의 디자인이 보였고
케이크의 맛이 느껴졌고,
카페에 들어오는 순례자들의 표정이
나와 같음을 알 수 있었다.
몸을 녹이고 배를 채우니
얼른 숙소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져서 숙소로 곧장 향했다.
고난 끝에 도착한 숙소는 정말 내 순례길 숙소 통틀어
가장 맘에 들고 가장 편하게 쉬었던 숙소가 되었다.
호스트 할머니께서 방 침대마다 수건과
선물이라며 가리비 고리를 놓아주셨으며
추울까 봐 히터도 틀어놔 주셨다.
또 편하게 사용하라며 한 층 전체를 내주시기까지 했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오니 개운해져서
다시 기운이 솟아났다. (아주 잠시동안)
다행히 비가 개고 해가 나와 빨래를 해서 널어두고
고난 길을 함께하면서 망가진 언니의 신발을 수선하고
허기는 채웠지만 배는 여전히 고파 주방에 가서
짜파게티 끓이는데 독일에서 오신 남성분이
흥미를 보이셔서 “Do you know parasite?"를 물으며
나름의 스몰토크를 시도해 봤지만
보지 않았다고 해서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짜파게티를 정말 맛있게 먹고
쉬었다. 그냥 앉아서, 누워서 쉬었다.
쉬면서 오늘 걸은 거리를 계산해 보니
conde에서 fao까지는 약 25km.
첫째 날에 비하면 10km 정도 짧은 거리였지만
날씨와 도로 이슈로 체감상 첫째 날과 똑같았다.
그래서 더욱 격렬하게 침대에 누워 쉬었다.
쉼의 필요성을 정말 많이 느꼈다.
그렇게 쉬다가 마을 구경 겸, 저녁 먹을 겸 해서
숙소를 나섰다.
나서는 길에 같은 숙소에 묵는
할머니 순례자 두 분이서
식당 가는 거면 같이 가자고 해서 함께 식당으로 갔다.
숙소는 먹어보고 싶던 순례자 정식!
순례자 정식은 어느 가게나
다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게마다 달라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둘째 날 먹은 순례자 정식이 첫 정식이었는데
나는 파스타 정식, 언니는 스테이크 정식이었다.
무슨 호박수프? 가 식전음식으로 나왔다.
그러고 나서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가
메인 요리로 나왔는데
흠,, 그냥 소금덩어리였다. 그래서 맥주를 엄청 마셨다.
그리고 마을 구경은 피곤해서 패스하고 숙소 와서
둘째 날도 역시나 기절했다는 마무리.
첫째 날에는 ‘무리하지 말자!’를 느꼈다면
둘째 날에는 ‘이걸 왜 하는 거지?’하는 의아함과
‘오늘도 해냈다’는 뿌듯함을 동시에 느끼는
모순적인 날이었다.
지옥의 데크길-돌길 콤보가 순례길은
한 번이면 족하다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지만
(그리고 이 생각은 바로 다음날 바뀌었다.)
지금도 여전히 가장 생각나는 길이다.
길은 재미없고 힘들었지만
이 길을 걸으면서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길 탓을 하면서 다 토해낼 수 있었고,
다리가 부서질 것 같았지만 해냈다는 뿌듯함이
또 다른 자존감으로 쌓아졌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옛말처럼
고생을 다 하고 나서 딱 마주한
카페에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아늑한 숙소에서 편히 쉬었던 이 경험들이
다시 돌이켜보면
아무 생각 없이 떠났던 순례길에서
무언가를 깨달아가는 첫 발자국이자
진정한 순례길의 시작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날의 경험으로 인해
앞으로의 순례길에서 힘듦과 어려움을 마주치면
힘든 건 힘들다고, 어려운 건 어렵다고,
재밌는 건 재미있다고, 신나는 건 신난다고
그 감정을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그 감정 자체로 느끼면서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둘째 날도 무사히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