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생각」
부모님 댁은 천국이다. 임신 초기 무턱대고 부산행 기차표를 끊었다. 입덧으로 만사가 힘들어져 쉴 곳이 필요했다. 꼬박 12시간을 일하는 재석이 덕에 하루 대부분을 혼자 있어 딱히 무언가를 해야 하는 부담은 없었지만, 눈에 보이니 집안일에 손을 대게 됐고 몸은 지쳐감에도 눈에 거슬리는 먼지는 늘어나니 당최 쉴 수가 없었다. 퇴근 후 지친 재석이를 찡그린 얼굴로 맞아야 하는 일도 마음을 불편하게만 한다. 더군다나 나날이 속을 뒤집는 입덧의 물결은 높아져만 가고, 배달과 포장은 지겨워졌으니 대책이 필요했다.
부산 도착. 배부른 베짱이로 변신. 임신을 내세워 침대 위 한 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딸내미 앞으로 익숙한 밥상이 때마다 차려지고 또 치워진다. 결혼 전엔 겪어보지 못한 극진한 대접.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도록 엄마와 아빠는 갖은 신경을 다 써주셨다. 멀어지니 애틋함이 증폭된 게 틀림없다. 편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눈을 뜨면 암막 커튼이 창을 모두 가리고 있어 시간을 알 수 없을 만큼 방안이 캄캄했다. 이 얼마나 섬세한 배려인가. 불면으로 꽤 고생했는데, 일찍 잠드는 부모님의 수면 시간에 따르다 보니 엉망이던 잠자리도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일주일 뒤, 아쉬움 하나 없이 부모님께 또 오겠다 약속하며 당차게 현관문을 나섰다. 한참을 다시 올 수 없을 거라 상상도 못 한 채.
서울. 얼마 지나지 않아 출혈이 생겨 꽁꽁 묶인 신세가 됐다. 기차는커녕, 집 앞 산책길도 나가지 못하는 형편. 임산부의 호사를 누릴 거란 계획은 보글보글 물거품이 되어간다. 차분히 가라앉아 그저 누워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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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중기에 접어들어 안정기가 되면 많은 임산부가 태교 여행이라는 걸 간단다. 배가 불러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에 떠나는 마지막 자유로운 여정이랄까. 피고임으로 한참을 걱정 주머니만 짊어지고 있었으니 여행이란 건 생각지도 못했다. 어느 정도 몸 상태가 괜찮아졌을 때가 이미 6개월 차. 배가 빨리 차올랐던 덕에 누가 봐도 임산부임이 꽤 티가 나는 상태다. 조금 살만해지자 갇혀만 지내던 이는 슬슬 욕심이 난다. 태교 여행이라. 필수 항목은 아니나, 까짓거 가봐야겠다. 그동안 죄여 살았던 시간을 보상받고 싶었는지, 어디론가 가야겠다는 임산부의 다짐은 강경했다. 다른 이들은 어디로 떠나는가.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는 괌. 수많은 여성이 배 속에 아기를 품고 그 섬으로 향했다. 농담처럼 괌으로 가는 비행기에는 반 이상이 아기와 엄마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해외지만 비교적 비행시간이 짧아 임산부에게도 큰 무리가 없는 여행길이다. 덕분에 현지 아웃렛에는 산모를 유혹하는 아기용품들이 가득해 돌아오는 그녀들의 짐 가방에는 아기 물품이 가득하다는 입소문을 들었다. 예비 엄마들에겐 천국 같은 곳이겠구나. 하나, 오래 몸조심을 하고 지냈던 고령 산모에게는 꿈 같은 소리. 아무리 비행시간이 짧다 한들, 엄두가 나지 않는 노정이다. 해외여행? 절대 무리지. 후회할 짓은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줄어들 생각이 없다. 누워만 지낸 시간이 갑갑하게 목을 졸랐다. 이대로 육아 단계로 넘어간다면 고삐 풀린 채 살아가던 하고재비는 미쳐버리지 않을까? 피고임도 대부분 사라져 살살 움직이기 시작한 터라 온몸이 근질거린다. 자문위원에게 태교 여행에 관해 물으니 28주가 넘어가면 긴 일정은 무리라는 답이 돌아와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비행기를 타는 건 아무래도 겁이 난다. 몸 상태도 몸 상태지만 우려가 생활인 자, 확실한 의료 기관 없이 멀리 떠나는 건 꺼림직했다. 며칠, 육지만 통해 가는 국내 여행지를 살펴봤음에도 까다로운 임산부의 입에 맞는 목적지는 없다. 시간을 낼 수 없는 바쁜 재석이 덕분에 일정을 맞춰줄 수 있는 동행자도 찾아야 하니 할 일이 많다. 불안한 임산부 혼자 유유히 떠날 수는 없으니까. 이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들. 한창 육아 전쟁터에서 몸 바쳐 싸우고 있는 그녀들 중, 시간을 낼 수 있는 이는 하나도 없다. 겨우 전 직장에서 친분을 쌓은 동생 둘과 내가 살던 고향, 부산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그녀들도 바쁜 생활 중 이틀 일정 빼기가 결코 녹록지 않더라. 역시 익숙한 곳이 최고. 감동이와 관련된 일에선 담대하지 못한 새가슴 어미는 먼 곳으로 떠나지 못하는 안전 제일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엄마에겐 비밀이다. 딸내미 건강 걱정이 과도한 엄마에게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하루를 보낸다고 전하면 분명 벼락같은 화를 낼 게 뻔했다. 그녀에게 가슴 졸이는 하루를 선사하고 싶진 않았다.
기분은 내야지. 숙소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 외곽에서 골랐다. 낯선 곳에서 하루를 보내면 제법 멀리 온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이번 여행과 관련된 모든 것엔 ‘마지막’이라는 말을 붙였다. 서글프지만 출산 전 할 수 있는 마지막 행위임이 틀림없으니. 그에 따라 평소 같은 궁상은 접어둔 채 좋은 곳에서 좋은 걸 먹으며 이틀을 보내겠다 마음을 다지게 된다. 오래 차를 타 이동하는 건 어려웠기에 숙소에서 식사하고 간식을 사 먹었다. 별다른 일정은 없었지만 좋았다. 수없이 봐 왔던 볕이 짱짱한 날씨도 괜히 좋았고, 쫓기지 않는 여유로운 일정도 반갑다. 임신 후 집과 부모님 댁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묵는 일이 처음이라 썩 괜찮은 여행처럼 느껴졌다. 20년을 살아왔던 부산이지만 오늘만은 새롭다. 숙소 안과 밖, 둘러싼 나무도 예뻤고 바다도 곱다.
이튿날, 밖으로 나와 잠시 해안을 따라 걸었다. 흔하게 보고 자란 바다. 부산 사람은 바다에 큰 흥미가 없다 그리 떠들고 다녔건만, 오늘만은 반짝이며 넘실거리는 파도가 보드라워 자꾸 눈길이 간다. 육아를 하다 보면 출산 전이 전생처럼 느껴질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다시는 갈 수 없는 생이란 뜻이지. 생각해보니 그럴 것도 같다. 이렇게 홀로 여유를 즐기는 시간을 다시 찾기까진 꽤 시간이 걸리겠지? 잠시 잠깐 물리적으로 아이와 떨어져 있을 수는 있겠지만 아이에 관한 생각까진 떼어놓을 수 없는 게 엄마의 삶일 텐데. 출산 후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히 큰 숨이 쉬어진다. 바다 곁 신선한 바람을 들이켜 이 순간을 마음껏 누리고만 싶어졌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자꾸만 미련과 아쉬움이 쌓여간다. 눈앞에 보이는 온갖 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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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고 싶지 않던 이틀의 자유를 마치고, 부모님 댁으로 향한다. 당장 부산 땅에 떨어진 것처럼 어설픈 행색을 보이며 가족과 재회했다. 곧바로 이전보다 곱절은 게을러진 베짱이로 태세 전환. 이제는 임신으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커다란 배를 가진 딸을 보니 엄마는 더욱 애가 닳는 모양이다. 한 단계 차원이 높아진 끔찍한 대우로 가족을 맞는다. 역시 편하다. 때마다 저절로 차려지는 밥상, 곱게 접힌 세탁물. 이리도 행복한 일인가 싶다.
일주일 정도 부산에 머무르려던 일정이 두 배로 늘었다. 끝을 향해 가던 교정 치료의 마무리를 위해서였다. 부산에서 시작한 교정은 서울로 거처를 옮기고도 치료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가까스로 두 달에 한 번 부산에 와 치료를 받았으니 예정보다 진행이 느려져 어째 3년을 채워가고 있다. 담당 선생님은 아이를 낳고는 당분간 병원에 오지 못할 거라 단언하시며, 기왕이면 부산에 있을 때 서둘러 마무리하자 제안하셨고 불러오는 배를 보니 그럴 것도 같아 격렬히 동의해버렸다. 별다른 일정이 없어 부산에서 며칠 더 머물 수 있는 여유가 있었기에 재빨리 교정 치료를 마쳤다. 이에 붙은 교정 장치 대신 꼈다 뺄 수 있는 유지 장치도 제작했다. 출산 시 힘을 주다 소중한 고른 이가 틀어지면 어떡하나 미리 염려했던 자에게 꼭 필요한 선물이다. 출산 준비를 든든히 했구나. 더불어 한동안은 치과 치료를 위해 부산에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한결 짐을 던 기분도 들었고, 고향 방문의 명분을 잃은 듯해 묘한 아쉬움도 들었다.
그렇게 길어진 이 주간의 휴가. 삼시 세끼 잘 먹고 잘 자니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임신 생활이 유유자적 이 상태로만 계속된다면 꽤 할만한 거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엄마는 마지막 날 떠날 채비를 하며 짐을 싸고 있는 딸내미 가방에 이것저것 밑반찬을 욱여넣어 주셨다. 오가기 힘든 시기니 아기를 낳고서나 보려나? 이전처럼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 이리 애틋했다고. 배부른 딸과 헤어지며 그리 아쉬워하는 엄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딸내미 엄마가 되면 만나요, 엄마! 잘 지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