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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Oct 29. 2022

빌려 준 노트

  “노트 좀 빌려주지 않을래?”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레 나타나 당당히 요구하는 네게 나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흔쾌히 노트를 건네어 줄 뿐이었다. 그리고 네가 한나절이 다 지나가도록 그 노트를 돌려주러 오지 않았을 때에도 별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잘 쓰고 있겠지. 그게 내 생각이었다. 학교는 노트를 쓸 일이 많다. 그렇기에 너도 문득 노트를 쓰고 싶어진 거겠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네가 내 노트에 필기를 하던 낙서를 하던 혹은 이미 질려서 학교 어딘가에 버렸다고 하더라도 나는 신경 쓰지 않을 셈이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하교 직전에 네가 웃으며 돌려준 노트를 슬쩍 들여다봤을 땐 멈짓 할 수밖에 없었다. 무심히 늘어선 공백들 중에서 네 선택을 받은 네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심장 소리가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장난이었다. 확실히 너답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장난. 하지만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이미 난 네 장난에 빠져있었으므로. 너는 아침에 내게 노트를 빌려서 어디로 향했을까? 네 발걸음, 시선, 지나치는 사람들. 그리고 네가 들어갈 교실, 도서관, 식당, 테라스. 모두 내가 직접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너는 복도를 거닐며, 혹은 책상이나 도서관에 앉아 노트를 펼쳤겠지. 무엇을 쓰고 싶었을까? 무엇을 남기려 노력했을까? 그러다 결국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 노트를 내려다봤을 네 표정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너는 내 노트를 들고 하루 종일 학교를 거닐다 남기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나에게 돌려줄 단 네 글자만을 넣어온 것일 테지.

  나는 당장 펜을 꺼내 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네가 쓴 네 글자 뒤에 있는 공란에, 네가 투명한 형광펜으로 열심히 밑줄 그어놓은 그곳을 채워 넣고 싶었다. 네가 남기고 싶었던 것을 나라도 대신해서 남겨놓을 수 있도록. 아니, 사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실은 나는 그냥 너를 향해 쓰고 싶었다. 저토록 외로운 네 글자 뒤에 나를 써 주고 싶었다. 그래도 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잠깐의 충동이 가라앉자 조용히 짐을 챙겼다. 그리고 네가 기다리고 있을 교정으로 향했다. 아직은 괜찮다. 너는 아직 이곳에 있으니까. 저런 노트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무언가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너와 함께 교문으로 향하는 긴 교정을 가로지를 수 있는 이 나날이 끝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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