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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Oct 29. 2022

여유 부리기

  저는 여유 있는 삶을 사랑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진 않아요. 살다 보면 그런 날 있잖아요. 수업이 일찍 끝나거나, 혹은 조퇴를 했다거나 해서 날이 밝을 때 밖으로 나온 날이요. 그럴 때면 쏟아지는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그렇게 설렐 수 없어요. 파란 하늘은 오늘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알려주고요. 매일같이 저를 재촉하던 시곗바늘도 잠시 멈추고, 마치 무한한 시간이 눈앞에 늘어서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감정을 저는 사랑해요.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최대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요. 어떻게 하면 이 복잡한 삶에 잠시 쉼표를 두고 그런 여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철이 없다며 핀잔을 주거나,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지만요. 저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고 있답니다.

다행히 저희 부모님은 제 의견을 잘 들어주시는 편이에요. 억지로 학원을 보내시지도 않고요. 그래서 저는 어느 정도 제 생각대로 여유로운 시간을 누리며 지내고 있어요.

  어제 있었던 일이에요. 저는 학원을 가는 친구를 배웅하고 근처에 있는 서점에 들렀어요. 사고 싶은 책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서점이란 곳이, 책이 정말 많잖아요? 새로 나온 신간이나, 그동안 못 발견했었던 책들을 이리저리 보고 있자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버리고 말았어요. 서둘러 책을 사들고 나오자 밖은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어요. 오늘의 여유로운 시간은 책과 함께 보냈구나, 하는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랬어요.

  어두운 거리를 지나 집으로 향하자니 평소와 다른 기분이 들었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밖을 걷는 건 드문 일이었으니까요. 거리 곳곳에는 저와 비슷한 또래의, 익숙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았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다들 뭐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치자 곧 이곳에 주변 지역에서 유명한 학원가라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다들 시간을 힘껏 쏟아부으며 공부하고 있구나. 한눈에 알 수 있었어요. 팔랑이는 시험지, 무거운 책가방, 눈물짓는 눈, 심각한 표정, 재빠른 발걸음. 얼마나 열성적으로 노력을 해야 저런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자 대단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저처럼 변변치 못한 사람이 끼어든 것 같아 어쩐지 부끄러워졌어요.

  덩달아 빨라진 발걸음으로 이 엄청난 곳을 벗어나면서 저는 생각했어요. 제게 있는 여유 있는 시간을 잘 모아뒀다가 그들에게 나눠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저는 분명 그 시간들을 사랑하지만, 왠지 저보다는 그들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았어요. 저처럼 느긋한 사람보다는 저렇게 열성적으로 시간을 쏟을 줄 아는 사람에게 건네주는 편이 세상을 위해 더 좋을 것 같다고나 할까요.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는 시간도 저 사람들에겐 가치 있는 시간일 수 있으니까요.

  부디 제가 사랑해마지않는 여유로운 시간이 그들에게 가서도 충분히 사랑받기를. 만약 시간을 건네주게 된다면 제가 바랄 것은 그거 하나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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