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에서 15분. 비가 오지 않으면 늘 노랑이와 산책을 했다. 노랑이의 하얀 솜방망이가 이슬 어린 흙바닥을 디뎠다. 분홍빛 작은 코가 풀냄새를 맡았다. 일련의 행동들은 모두 내 손에 입가를 스치는, 짧지만 충분한 애정을 담은 인사 이후에 이뤄졌다. 나이 먹은 노랑이의 애정표현은 아주 조금 더 점잖아졌다.
고양이집 앞의 흙바닥에서 그 옆의 화단까지, 화단 옆 수로 건너편의 경사면에서 농기구 창고까지. 노랑이는 나와 함께 천천히 행동반경을 넓혀갔다. 나는 이 순간만큼은 노랑이가 정말로 행복했을 거라 확신한다. 자고로 동물은 흙을 밟아야 행복하다는, 우리 엄마의 지론을 믿어보는 것이다.
노랑이는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야옹, 하고 한 번 울었다. 산책할 시간이라는 알람이었다. 밥 달라던 솜방망이 알람에 비하면 역시나 많이 점잖아진 알람이었다.
노랑이의 식사량이 줄었다. 노랑이의 나이 듦을 절감한 우리는 고민 끝에 노랑이를 농막 안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실외에서 키우던 동물을 실내로 데리고 들어오는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다. 수술에 준하는 치료가 필요한 경우와, 죽음이 임박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다. 노랑이는 후자였다.
동물은 자기 입으로 아프다 말할 수 없다. 고통을 쉽사리 표현하지도 않는다. 야생에서 '아프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0번 소원은'내 반려동물이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세요.'일 것이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농막 안쪽에 노랑이 집이 생겼다.
14년 만에 다시 실내생활을 시작한 노랑이는 농막에 발을 들인 첫날, 놀랍게도 밥을 싹싹 긁어먹었다. 우리는 노랑이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노랑이는 실내에서 살 준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내 엉덩이도 기뻐했다. 산책하는 노랑이를 지켜보며 앉아있던 시멘트 벽돌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차가워진 계절이었으므로.
제법 따뜻한 혼자만의 집을 갖게 된 노랑이는 어슬렁대며 농막을 누볐다. 못쓰는 소파에 앉아 낮잠을 자기도 했고, 작은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들어가 앉아있기도 했다. 아침이면 나는 손으로, 노랑이는 턱으로 인사를 나눴다. 겨울이라 추울까 나는 손으로 노랑이의 등과 머리를 슥슥 쓸어주었다. 노랑이는 껴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고양이니까. 노랑이는 옆구리로 내 종아리를 슬쩍 쓸다가 내 슬리퍼에 두 발을 얹고 살포시 기댔다. 노랑이와 보낸 마지막 겨울이었다.
노랑이가 정말로 떠나버린 지 두 달이 조금 넘은 지금 농막에는 두치라는, 한 살이 좀 넘은 암컷 고양이가 살고 있다. 두치는 농막과 정원, 밭을 오가며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우리가 농막을 들여다볼 시간이다 싶으면 들어와 있는데, 그래서인지 농막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다른 고양이들과 더러 다툼이 있다. 두치의 허용범위에 있는 고양이만 농막에 출입할 수 있다.
신기한 건, 노랑이가 농막에 살 때는 어떤 고양이도 농막에 들어오려 시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때도 농막에는 농막 내부의 노랑이집과는 분리된 '고양이굴'이 있었다. 밖에 사는 고양이들이 따뜻한 곳에서 자고 나갈 수 있도록 해둔 공간이었다. 그런데 노랑이가 농막에 살기 시작한 뒤로 다른 고양이들은 그 공간을 쓰지 않았다.
노랑이의 노쇠함은 우리 인간들보다 그들이 더 잘 알았을 텐데, 그들은 감히 노랑이의 공간을 빼앗으려 들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젊은 고양이들의 존중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한다. 어쩌면 내가 없을 때 노랑이가 전심전력으로 그들을 내쫓았을지도 모른다. 동물들에게는 사람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는, 그들만의 모습이 있다.
*2005년부터 2024년까지, 열여덟 마리의 고양이와 일곱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았고 그중 일부와 이별했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과의 인연은 이별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떠나간 존재들, 그리고 제 옆을 지키고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 놓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