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새끼 개라고 등록할 수는 없으니, 이름을 지어야 했다.
병원 갈 때 들어갈 이동장인 줄도 모르고 유심히 살피는 강아지.
가족들과 이 강아지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그간 우리 집 동물들의 이름은
1. 개인적 기원(일등이, 올백이)
2. 함께 태어난 형제의 수(산, 구름, 바다와 알파, 파이 그리고 하나, 두나, 세나, 네나),
3. 2에 덧붙인 만화 주인공 이름(보라돌이, 뚜비, 나나, 뽀와 한치, 두치, 세치, 네치, 부꾸)
4. 외양적 특징(꼴매, 까미, 노랑이, 눈이, 초코, 흰돌이, 얼룩이, 콩알이)에 따라 지어졌다.
한 마디로 큰 고민 없이 부르기 쉽게 지었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다른 집 반려동물들처럼 귀엽고 깜찍한 이름을 지어줄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이 다시 떠올랐다. 집에 새로운 동물들이 올 때마다 떠오르는 고민이었으나, 새로운 동물이 들어오는 일은 이미 많은 동물들과 함께하는 우리 집으로서는 결코 기쁘게 새 친구만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이름은 늘 속전속결로 결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야니까 두부? 비지? 두부를 좋아하는 아빠는 두부는 음식이니, 개 이름으로 쓸 수 없다며 반대했다. 같은 이유로 비지도 기각. 아빠는 백로와 처서 같은 절기 이름을 붙이자고 했는데 이 귀여운 강아지에게 붙이기에는 너무 할아버지 같았다. 절기가 나오니 이번에는 '여름이'라고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여름에 왔으니까.
그런데 사실 '여름이'는 좀 그랬다. 몇 년 전부터 옆집에서 밥을 주고 살뜰하게 챙기던 길고양이 이름이 여름이였기 때문이다. 주말 오후에 집에 있으면 "여름아!" 크게 부르는 옆집 부부의 목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리고는 했다. 늘 큰 소리로 여름이를 부르던 옆집 부부의 목소리에 우리 집 개가 짖으면 좀 그렇겠지. 옆집 고양이 여름이는 외출냥이로 잘 살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곧 다가 올 '가을'을 강아지 이름으로 붙이기로 했다.
이렇게, 우리 집에 들어온 강아지는 '가을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귀신같이 밤부터 새벽까지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시원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니 가을이 오자, 가을이 온 것이다.
다음 날 병원에 가니, 가을이의 배에 볼록한 뭔가가 만져졌던 건 탈장이라고 했다.
그럴 것 같은 예감은 있었다. 초코가 얼마 전 비슷한 소견을 보며 병원에 갔고, 그때 탈장은 아니지만 장에서 지방이 조금씩 새어 나와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가을이의 배는 초코와 비슷했지만, 튀어나온 부분이 좀 더 컸고 밥을 먹을 때마다 조금씩 더 커지는 것처럼 보였기에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
가을이는 그날 바로 수술을 받았고, 마취한 김에 중성화까지 해버렸다.
꽤나 억울해 보이는 작은 얼굴 두 번째로 병원 가던 날, 가을이는 무릎에 앉아갔다. 지금은 무릎에 상반신도 다 못들어갈 정도로 컸다. 오른쪽은 병원 갔다와서 놀다 뻗은 가을이.
사실 좀 고민했던 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가을이를 키울 생각이 없었다. 엄마는 매우 키우고 싶어 했고, 아빠는 그다지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았고, 나는 그 중간이었다. 가을이는 참 귀엽고 예뻤지만 우리 집은 우리가 책임져야 할 동물들로 가득했고, 이들 중에 우리가 직접 데려온 건 개농장으로 팔려갈 뻔 한 흰돌이뿐이었으니 우리는 우리가 애니멀을 호딩하는 것이 아니라 애니멀이 우리를 호딩해 온 긴 세월을 이미 겪어왔고, 이 세월이 끝나려면 10년은 더 남았다. 그래서 나는 마을 게시판에 가을이 사진을 찍어서 붙여놓고 주인이 있다면 데려가라고 할 참이었다.
두 번째 진료를 기다리며 병원에서 잔뜩 쫄아든 가을이. 병원에 들락거리며 가을이가 차멀미를 한다는 걸 알게되었다. 집에 온 가을이는 한층 편안한 얼굴이다.
아직 2.5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5킬로가 넘은 가을이 등에는 인식칩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수의사 선생님은 탈장 때문에 누가 버린 것 같다며, 우리 집으로 오지 않았으면 고깃집에나 갔을 거라고 했다. 올해 개 식용이 금지되었는데도! 수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시골집을 나와 돌아다니던 반려견을 잡아먹고 발뺌했다는 뉴스 기사들 여러 개가 머릿속을 스쳤다. 게시판에 가을이 사진을 붙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신난 가을이. 가을이가 데크 밑으로 숨지 않도록 데크를 다 막았다. 가을이는 여기가 자기 집이라고 확신한 듯, 집을 지어주기 전 실수로 줄이 풀렸는데도 떠나지 않았다.
수의사 선생님은 '이 친구도 키워야겠는데요?'라고 은근슬쩍 우리를 압박했다. '이거 이러다가 나중에 봄이, 여름이, 겨울이도 생기는 거 아니에요?' 하는 말을 남기고 선생님은 가을이의 탈장 수술과 중성화 수술을 위해 가을이와 함께 수술실로 사라졌다. 동물들에게 입소문이 제대로 난 우리 집 사정을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우짜든동, 가을이가 마지막이다.
넥카라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냄새 탐색에 열중한 나머지 넥카라를 삽으로 쓴 뒤 자랑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보는 사랑스런 가을이.
너무 무럭무럭 자란 나머지, 수술을 받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넥카라가 작아져, 수술부위에 주둥이가 닿게 되었다. 얼른 플라스틱 제본용 표지를 하나 붙여서 넥카라를 넓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가을이는 넥카라를 삽으로 쓰면서 우리 집 정원 흙을 다 퍼담고 다녔다. 쑥쑥 크는 시기여서일까. 수술을 두 군데나 받았는데도 아픈 내색도 없이 명랑하게 자라는 가을이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아파도 산책만 잘하는 가을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파도 산책은 해야겠다는 강아지'였다.
빠르게 아물어가는 가을이의 수술자국을 보면서, 우리는 가을이가 어디서 왔을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너무 경계해서 들개의 새끼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탈장을 보니 누가 버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앞으로도 가끔 궁금할 것 같지만 어찌 되었건, 이제 가을이는 우리 집 강아지다. 앞으로는 위 사진들처럼 예쁘게 웃을 일만 있도록 키우고 싶다.
우리 집에는 이미 다섯 마리 개와 다섯 마리의 밭냥이가 있다. 우리 가족의 암묵적 소원은 '동물은 이제 그만'이고, 그 목표를 위해 오랜 기간 꾸준히 노력해 왔다. 밭냥이들까지도 군청과 주민센터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포획틀을 빌려다 악착같이 중성화를 시켰다. 이제 우리 집 열 마리 동물들이 멀리 여행을 떠나는 그날까지 잘 먹이고 잘 재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우리 집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던 노랑이로도 모자라서 이런 시골 땅까지 찾아와 같이 살겠다고 한 강아지가 나타났다. 아무래도 소문이 제대로 난 모양이다.
그러나, 오는 가을을 막을 방법이 있던가? 가을이가 병원에 다녀온 뒤 아빠는 가을이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가을이가 우리 집 개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가을이는 넥카라를 쓰고 즐겁게 산책을 했고, 은둔 고양이 콩알이를 제외한 우리 집 동물들 모두와 한 번씩 만나보았고, 우리가 준 장난감과 서울 사는 친구가 보내 준 커피나무 장난감까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잘 지냈다.
커피나무 막대기는 이제 아주 홀쭉해졌다.
우리는 그렇게 9월을 맞았다.
가을이 오자, 가을이 왔다.
*2024년 11월, 여섯 마리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다섯 마리 고양이들도 밭과 마당, 저희 집 창고를 누비며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올 7월부터 떠나보낸 동물들의 이야기를 <미처 하지 못했던 사랑의 기록>이라는 이름의 브런치북으로 남겨왔습니다. 11월 28일 목요일, <미처 하지 못했던 사랑의 기록 2>로 돌아왔습니다.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과 생겨날 이야기들을 마저 꺼내보려 합니다.
*2005년부터 2024년까지, 열여덟 마리의 고양이와 일곱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았고 그중 일부와 이별했습니다. 그들과의 삶과 이별을 담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읽고 싶으시다면, 아래 <미처 하지 못했던 사랑의 기록> 링크를 눌러보세요. 떠나간 존재들, 그리고 제 옆을 지키고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 놓기 시작하던 시절의 기록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20052024
*위 이야기에 등장한 우리 집 엘리베이터로 뛰어든 '노랑이'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위 이야기에 등장한 은둔 고양이 '콩알이'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