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소한

두 번째로 쓰는 식물 일기 #1

모든 생명에는 빈틈이 필요하다

by 홍슬기



생명이 있는 곳에 자꾸 눈이 간다



한 달 전부터 식물을 키우고 있다. '싱고니움'과 '율동자'라고 불리는 다육이. 큰 쇼핑몰 구석에 있는 홈가드닝 판매점에서 데려왔다. 이전에도 여러 번 식물을 데려와 잘 키우지 못했는데, 왜 갑자기 식물을 키우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이유를 골똘히 생각해보자면, 푸르른 식물이 주는 힘을 조금 알게 된 거 같기도 하다. 같은 공간이라도 식물이 있는 모습과 없는 모습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리고 식물이 있는 곳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도 그런 공간을 꾸미고 싶었나 보다. 이곳저곳 식물이 있는 따뜻한 공간을 가지고 싶었나 보다.


인터넷에서 키우는 법을 찾아 적어놓았다. 싱고니움이니까 '싱이', 율동자니까 '동이'라고 이름 붙였다. 눈을 뜨면 식물이 있는 내 방 베란다로 갔다. 식물은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있는데 자꾸만 살펴보게 된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자꾸 눈이 가는 법인가 보다. 식물은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니 내가 더욱 샅샅이 살펴보고 오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게 되었다.




푸르던 잎이 노랗게 바뀌었다


동이는 다육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가만히 놔두면 정말 그대로인 아이였다. 그런데 싱이는 괜찮은 거 같더니 뭔가 이상했다. 푸르던 잎이 노랗게 바뀌었다. 물이 부족한가 싶어서 잔뜩 줬는데, 한번 노란색으로 된 잎은 돌아오지 않았다. 속상하지만 시들어버린 잎들을 떼어냈다. 그리고 또 며칠 후 2개 잎이 또 노랗게 변해버렸다. 과습때문에 그런가 싶어서 이번에는 하루 이틀을 물을 안주기도 해봤다. 그래도 다시 푸르게 돌아오지는 않았다. 풍성했던 싱이가 자꾸 작아지는 걸 보며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가 싶어서 다시 인터넷으로 싱고니움 키우는 법을 찾아보았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싱고니움은 여름에는 흙을 항상 촉촉이 유지해야 하고 직사광선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햇빛이 너무 강하구나 싶어 빛이 약하게 들어오는 곳으로 자리도 옮겨주었다. 그래도 싱이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처음 데려온 활기찬 푸르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물을 주는데, 물이 흙에 스며들지 않고 표면에 동동 떠있었다. 흙으로 스며들어야 뿌리에도 수분이 공급돼서 잎도 잘 자랄 텐데 왜 이럴까 싶었다. 생각해보니 흙과 커피가루를 섞어서 화분 가득 흙을 빡빡하게 채워 놓았었다. 화분이 흙으로 꽉 들어차서 물이 흡수되지 않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큰 자갈과 작은 자갈, 투명한 화분을 사 왔다. 분갈이를 하기 위해 화분에서 싱이를 꺼내니 바닥 쪽 흙에 곰팡이가 생긴 거 같았다. 통풍이 문제였구나. 숨 쉴 틈 없이 가득 차서 썩어버렸구나...



썩은 흙을 버리고 바닥에 큰 자갈을 깔고, 그다음 작은 자갈을 흩뿌렸다. 그리고 흙과 작은 자갈은 적당히 섞어서 싱이를 다시 심었다. 큰 자갈을 바닥에 깔아 배수층을 만들어 물이 빠질 수 있게 했고, 숨을 쉴 수 있게도 만들었다. 투명한 화분 덕에 물이 어느 정도 들어갔는지, 흙 상태가 어떤지 확인할 수 있게 만들었다.




모든 생명에는 빈틈이 필요하다



빈틈이 필요했구나. 식물에도 빈틈이 필요했다. 흙에서 자란다고 해서 흙만 가득 채우면 물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지고 식물은 시들어버린다. 화분을 가득 채울 필요는 없다. 작은 자갈도 넣고, 큰 자갈도 넣어야 한다. 화분에 빈틈도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나도 빈틈이 필요했다. 말로는 오늘에 충실하게 살자고 해놓고 내일을 위해 계획적으로 살아왔다. 계획이 어긋나면 불안해하고 속상해하면서 또다시 계획을 세워서 스스로를 달리게 했다. 계획을 세워도 그대로 되지 않는데, 세상의 수많은 변수를 무시한 채 나만은 계획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빡빡한 계획 속에서 어느새 나는 시들어있었다.


그렇게 시들어버린 나에게 불행이 다가왔고, 그 불행 덕분에 빈틈이 생겼다.


세상은 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빈틈
내일을 미리 기대하거나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빈틈
지금 성공이 영원한 성공이 아니라는 빈틈
지금 실패가 영원한 실패도 아니라는 빈틈
1년 후, 3년 후 생각하지 말고 정말 오늘을 살자는 빈틈


내 앞에 큰 바위 덩어리가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지만, 숨 쉴 틈이 생겼다. 그 틈 덕분에 이전보다 유연해졌다. 나를 빡빡한 흙 속에 몰아넣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햇빛이 내리쬐어도, 폭우가 쏟아져도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빈틈을 그 무엇으로 채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빈틈으로 잘 자라날 것이다. 싱이도 나도.







식물을 키우며 매일 자라는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다음 글도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20161204/103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바스락 소리가 날 거 같은 친구의 뒷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