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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Oct 07. 2022

꽃이 입은 옷

꽃을 좋아하게 되면서 꽃의 친척들도 좋아하게 되었다. 


꽃이 놓인 화단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화병도 눈여겨 보고, 다른 나라의 플로리스트들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꽃에 관한 동시도 쓰게 했다.





< 꽃병 >

     

               고하연

            

하늘빛의

롱 드레스   

  

퐁 퍼지는

풍선 치마   

  

우아한

갈색의 원피스  

   

꽃들도 저마다

옷을 입어요     



<꽃이 입은 옷 / 직접 찍은 사진>




노랑 튤립을 보고 있으면 초록 막대 끝에 물감이 묻은 것 같았다. 집으로 가져온 꽃다발의 포장지를 풀어 줄기들을 손질하고 선반에 있는 화병을 쭉 살펴본다. 하얀색의 라넌큘러스는 맑은 옥색을 품은 화병에 꽂고, 오렌지빛 자몽 튤립 한 송이는 납작한 베이지색 도자기 화병에 꽂는다. 붉은 장미는 라인이 멋스러운 갈색 맥주병이 어울린다. 그날 사 온 꽃을 꽃병에 꽂는 일은 꽃에 옷을 입히는 일이었다. 사람에게도 어울리는 옷이 있듯, 꽃에도 어울리는 꽃병이 있다. 이것 저것 매치하다보면, 꽃들도 패셔니스타가 되었다. 

꽃이 늘 드레스만 입는 건 아니었다. 가끔은 낡고 오래된 옷을 입기도 했다.      




이태원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와 모퉁이를 돌았다. 한여름 우리의 피부는 구릿빛이 되는데, 연탄은 뽀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타고 남은 연탄재, 손대면 톡 하고 쓰러질 것 같은 살구빛 연탄에 꽃이 꽂혀 있었다. 집게가 쏙쏙 들어가는 구멍은 한 송이 꽃을 위해 태어난 구멍이었다. 연탄은 원래 화병인 것처럼 그곳에 놓여있었다. 꽃은 연탄이라는 빈티지 옷을 입었다. 그 장면은 내게 야구공처럼 달려와 고정관념이라는 유리창을 깼다. 꽃을 꽂는 화병이 꼭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꽃에만 관심을 가졌던 내가 꽃이 좋으니 꽃과 연관된 다른 장면에도 사랑이 번져갔다.




@lewismillerdesign 인스타그램 이미지





이태원에서는 꽃을 연탄에 꽂았지만, 뉴욕에서는 꽃을 쓰레기통에 꽂아 화제가 되었다. 냄새나는 쓰레기통이 변신했다. <Flower Flashes>라는 프로젝트로 ‘Lewis Miller Design’이 깜짝 진행한 이벤트였다. 관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된 쓰레기통, 가로등, 공중전화부스, 담벼락 등을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했다. 눈살의 찌푸리는 공간이 주목받는 공간이 되고, 냄새나는 공간이 향기 나는 공간으로 변했다. 호텔 예식장 안에서나 볼 법한 디자인된 꽃들이 거리로 걸어 나왔다. 그 길을 스치는 수많은 사람은 우연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는 코로나 19로 고생하는 의료진을 위해 병원 앞을 꽃으로 장식하기도 하고 마더스데이에는 어머니인 여성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예술가의 프로젝트는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에게만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했다. 꼭 꽃집에 들러 꽃을 사지 않아도 볼 수 있는 화사함이었다. 한 사람의 유희에서 모두를 위한 공공미술로 확장되었다.






꽃의 시계는 계속 흐르지 않고 어느 순간 멈춘다.




생생했던 꽃은 시들면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꽃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짧고 강렬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꽃들의 끝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꽃 중에는 실용적인 목적만 달성하고, 시들지도 않았는데 버려지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예식장, 개업식, 장례식장에 놓인 꽃들이었다. 그 꽃들은 누군가에게 만끽되거나 소유되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한다. 나는 그동안 꽃집의 꽃들만 눈여겨보았다. 종종 마주쳤던 화환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거대한 화환들은 제사상의 사탕 같은 존재였다. 있지만 왜 있는지도 모르겠고 예쁘지도 않았다.





삿포로 거리에서 만난 화환


몇 년 전 삿포로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게 오픈을 홍보하는 물티슈나 전단지를 주는 것일까? 상상했다. 정장을 입은 직원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니 행사의 목적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온 감각의 버튼을 켜서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행사를 하고, 버려진 화환 다섯 개가 있었는데 그 안의 꽃들을 가져가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마트의 채소코너에서 상추와 깻잎을 담듯 사람들이 꽃을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도 동참했다. 아이와 나는 마음에 드는 꽃을 몇 개 화환에서 뽑았다. 다음 사람을 위해 욕심을 내지 않았다. 몇 송이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장면을 만나려고 여행을 온 듯 영화 같은 순간이었다. 우리는 두 손에 꽃을 들고 밤거리를 걸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차를 마실 때에도, 쇼핑할 때에도 꽃이 바닥에 떨어질까 봐 조심히 잡고 걸었다. 호텔로 돌아와 주스 병에 꽃을 꽂아 두었다. 몇 송이 꽃만으로도 호텔이 내 집처럼 아늑해졌다.

그때부터였다. 쓸모를 다하는 꽃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동안 스치기만 했던 화환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일본에서 만난 장면처럼, 여전히 생기 있는 꽃들을 버리지 않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눠 주는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꽃이 좋아서 꽃만 바라보다가 꽃을 담는 화병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화병이 꼭 예쁘기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연탄, 쓰레기통에 꽂힌 꽃도 꽃이었다. 꽃의 뉘앙스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꽃을 감상하는 사람에게도 시선이 옮겨졌다. 스스로 꽃을 살 수도 있지만, 누군가 만들어 놓은 꽃의 장면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후 종종 거리의 화단을 눈여겨본다. 누군가 빚어 놓은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꽃을 좋아하는 마음은 늘 꽃을 바라보게 한다. 그 곳이 어디든 꽃에 조명이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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