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도 땀을 잘 흘리지 않는다. 더워도 평정심을 찾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겨울은 다르다. 조금만 찬 바람이 불면 온몸에 닭살이 돋고, 공을 만들 듯 몸을 움츠린다. 봄, 여름, 가을 내내 밖에 살다시피 하지만 겨울이 되면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이불만큼 안전한 패딩은 없었다. 겨울에 약속을 잡게 되면 지하 주차장에서 바로 연결되는 쇼핑몰에서 만났다.
또한 겨울은 내게 패션 빈곤의 계절이다. 세 계절, 옷을 즐겨 입지만 겨울에는 알맞은 옷을 찾기 어려웠다. 멋을 내려고 겨울마다 노력했지만, 결과는 추위의 승리. 패션이고 뭐고 간에 그냥 따뜻하게 입자. 라는 생각으로 끝이 났다. 다른 식구는 다 견딜 만하다는데, 나만 집에서도 ‘추워. 추워’를 입에 달고 살았다. 이쯤 되니, 겨울이 미웠다. 겨울은 죄가 없었는데, 내 몸의 체질로 인해 겨울을 잘 지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올해, 마음의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의 겨울 방학(세 달)이 길다고 여겼는데, 바쁜 학기 중에 못 나눈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의 의상은 다른 계절에 즐기지 않는 블랙, 그레이톤으로 정하고 목도리, 스카프, 장갑 등으로 알록달록 포인트를 주는 것도 재밌을 듯했다. 추워서 오랜 시간 집에 있어야 한다면, 주제를 정해 하나의 공부를 해서 작은 성취를 이뤄보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마감 기한이 있는 공부는 생산성을 높여주었다.
가끔은 산책하러 나가서 정신이 번쩍 드는 기온 차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차가운 공기는 다른 계절에 느끼지 못하는 맑은 에너지를 선사했다. 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이렇게 마음을 바꾸고 보니 30년 넘게 미워한 겨울과 친해진 기분이었다. 진작 이런 마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동안 왜 그렇게 겨울을 미워했는지, 겨울을 붙잡고 사과하고 싶었다. 이런 극적인 생각의 변화가 저절로 찾아온 건 아니었다. 올해 초, 탐조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해림은 쌍안경도 빌려주고, 다양한 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르는 걸 알려주니 내겐 새 선생님이었다. 겨울이 되어, 탐조도 쉬어 가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겨울은 탐조의 계절이에요.”
“네? 겨울에는 새가 줄지 않아요?”
“철새들이 한국에 와서 새롭게 볼 수 있는 새들이 많아요.”
“이렇게 추운데 오는 거예요?”
“더 추운 지방에 있던 새들은 한국이 따뜻하다고 생각해요.”
“몰랐어요.”
“그리고 겨울에는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있어서, 새를 관찰하기 쉬워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가보니, 동네의 새들이 더 잘 보였다. 여름처럼 새가 잎에 가려 있지 않았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눈이 오면 새들에게는 땅속에 있는 먹이인 벌레를 찾기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겨울이 이토록 다양했다니! 새를 통해 겨울을 다시 만났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며 쓸쓸했는데, 새를 보기에는 딱 좋은 상황이었다. 새 선생님 덕분에 겨울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겨울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이제 겨울은 더 이상 추워서 꼼짝 못 하는 계절. 긴 시간을 견뎌야 하는 계절이 아니다.
아이와 가까워지기 좋은 계절이고, 탐조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계절이며, 작은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계절이다. 이토록 좋은 겨울. 이제야 비로소 겨울을 사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