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뻐간새 -8 이야기속 이야기 -레이디퍼스트 3

정말 레이가 하는 짓이 어이가 없어서 뻑간다.

by 이규만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정말 나를 맞이하는 표정은 그리 달가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를 만난 그야말로 형식상의 치레였다. 그것이 금방 곁에서 느껴질 정도로 그녀 표정이 확 드러났다. 좋아서 들떠 있는 표정이거나 남자에게 반해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어색하고 긴장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나긋하고 익숙함으로 손을 잡아끌었다. 너 같은 애송이쯤은 많이 다루어봤다. 그식이었다. 양해를 구한다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물어보지 않고 무작정 자신이 잘 아는 곳으로 따라오라, 앞서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옆에서 보조를 맞추는 것도 없었다. 발걸음이 빨랐다. 그녀는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이런 여자에게 금방 어딜 가자는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봤자 술값이 얼마나 나오겠어. 아무리 많이 나와 봤자 십만 원 안팎이겠지. 보통은 곱창이나 삼겹살을 곁들여 소주를 먹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을 대접한다고 조개구이집이나 생선 횟집이 내게는 크게 한턱 쓴다고 내는 정도였다. 대여섯 명이 모여 가봤자 십만 원 내외였다. 그 정도 기준에서 생각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남자도 아니고 여자랑 단둘이 만나 술을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나. 일차적으로 만나자마자 그 짓거리를 한다는 자체가 서로 어색하므로 술은 부가적으로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첨가적 요소일 거야. 그게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얼굴 보자마자 하러 가자. 그건 좀 아니지. 아무 때나 들이대면 여자도 싫어한다니까. 그래 우선은 여자가 하자는 대로 가는 것이 좋다니까. 만나면 절반이 여자 이야기인 녀석의 조언이 충분히 감응 적이었다. 종연은 항상 여자는 어떻게 대해여야 할지를 알고 덤비는 선수급임을 강조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물어보랬다. 그래. 어련하겠어. 여자한테는 잘하겠지. 네가 훨씬 더. 그런데 나는 레이를 만나는 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녀석을 거쳐 간 수려한 여자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도 않았고 지난번에 버럭 화까지 내어가며 녀석이 말리던 레이는 웬만큼 내게는 상처라면 상처였다. 녀석의 이야기를 자꾸 듣고 있자면 여자는 마치 훈장처럼 따 놓거나 자격증을 하나씩 취득하는 과정같이 들렸다.

좁은 골목길 사이에는 밖에서만 보아도 한눈에 고급 선술집이라는 금방 알아차릴 만큼 화려하게 이어졌다. 가다가 그중에 한 집에서 레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오빠 여기야. 어서 와. 레이가 이제야 준비가 끝났다는 소리로 들렸다. 드디어 너랑 같이 역사를 이룰 곳이 여기니? 앉자마자 와락 껴안고 키스하고 온몸을 더듬고 싶어졌다. 얼굴을 본 이후에 잠시 수그러지던 욕구가 불끈 일어섰다. 통화할 적에 이어진 레이의 목소리가 기억나서인지 다시금 설렘을 불러들였다.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외모보다는 겪어보면 요부의 끼는 숨겨져 있던 본능에서 올 것이라는 예감을 저 버리지 않았다. 단발머리의 그녀를 분명 만났지만, 아직 그녀를 겪어보지 못했다.

안에 들어서자 값비싼 실내장식들로 꾸며진 실내의 조명들이 빼곡하게 가득 차서 눈이 부셨다. 그냥 보통 술집이 아니었다. 거의 룸 수준의 분위기여서 하마터면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여자는 원래 분위기를 중시한다고 하더니 레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꼭 여기서 먹어야 해? 여기 이런 곳에서 먹을 돈이면 고깃집에 가서 갈비라도 실컷 뜯을 수 같은데……. 간단하게 술 한 잔 생각은 진작 갖지도 마. 나 비싼 여자야. 다른 곳에 가더라도 이 정도는 돼야 술 한 잔 먹었다고 하지. 레이가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대답하는 것 같이 침대만큼 넓은 소파에 먼저 앉더니 물끄러미 쳐다봤다. 뭐 해? 오빠.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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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터가 룸 안으로 안내하고 메뉴판을 가져올 때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룸인만큼 밖에서는 안에서 엉뚱한 짓거리를 하던 고객들의 사생활이니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겠다는 의도였다. 웨이터가 잠시 뜸을 들이는 동작들이 그렇게 인식하게 했다. 웨이터도 웨이터이지만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건 레이였다. 그렇게 좀 전까지도 당당하고 나를 이끌던 그녀가 되레 초조한 지 급작스레 표정이 어두워졌다. 관자놀이는 치켜 올라가고 눈망울이 흔들리고 계속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다. 레이는 어쩔 줄 몰라서 웨이터가 옆에서 더 지켜주기 봐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혹여 내가 옆자리로 옮기기라도 할까, 무척 두려운 표정이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해 보였다.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대니? 뭐가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내가 널 만나려고 한 거는 어떻게든 그 짓을 해보려는 게 목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이왕 이렇게 된 거 맘껏 취해 보자고.

메뉴판을 보자 예전에 접해보지 못한 갖가지 음식들이 빼곡하게 나열하여 있었다. 알파벳으로 표기된 것이 대부분은 영어 같았는데, 가로가 둘려 한글 발음으로 쓰였다. 중요한 거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그 음식들을 모른다고 레이에게 무식하다는 식의 핀잔을 들을까, 그런 것이 결코 아니었다. 가격이 보통은 이십만 원대에다가 삼십에다 심지어는 사십만 원도 훌쩍 넘어갔다. 나가자고. 나가자니까. 왜 이런 곳으로 왔어? 소리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나가자는 말도 못 하겠고 정말 궁색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조금 전까지 불안하게 표정 짓는 레이를 살피던 내가, 반대로 처지가 바뀌었다. 난색 해진 것은 레이가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주변머리 없이 무작정 여기 분위기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일어서 버릴까. 음식값이 너무 비싸다고 핑계를 대기에는 낯짝이 말이 아니었다. 체면치레를 차리자면 챙겨도 한참 전에 챙겼을 것이다. 레이 네가 안내한 곳이니 나중에 돈도 네가 내라, 해볼까. 아니야. 그냥 무작정 돈이 없다고 해 버릴까.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레이는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내게 묻지도 않고 탁자 위의 호출 버저를 과감하게 눌렀다. 알고 보니 메뉴판이 두 개여서 이미 레이는 고른지 한참 된 모양이었다. 그럼 나도 최소한 뭐 먹을 건지는 물어봐야 할 거 아니냐고. 채팅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네. 메뉴판 너머로 멀거니 쳐다보자 레이는 약간 당황하는 표정으로 미소 짓는 것이 최소한 보여준 예의였다.

“오빠가 이런데 처음 와 보는 것 같아서 웨이터 불렀어. 괜찮지?”

그럼 이제 와 안 된다고 할까. 그렇다고 해야지. 어쩌겠어.

“아, 뭐. 그럼 괜찮지. 그럼. 그렇고말고.”

“그런데 말이야. 오빠. 들어올 때 봤는지 모르겠는데 여기 가게 이름이 레이디퍼스트야. 봤어?”

“어? 못 봤는데. 밖에서는 하도 건물들이 비슷비슷 똑같이 보이는 곳이 여러 군데라서.”

“그랬구나. 내가 자주 오는 곳이거든. 여기 가게 간판을 좀 크게 붙이라 했었는데 아직도 안 했네. 어감이 너무 좋아. 레이디퍼스트!”

어련하겠니. 네 멋대로 하는 거랑 레이디퍼스트랑 뭔 상관인데? 아니면 남자들한테 군림하는 건가. 하긴 영국 마가렛 대처 총리도 그랬다고 하잖니. 퍼스트레이디라고. 여성시대라고. 페미니즘을 앞세우고. 젠장. 아마 나중에라도 침대로 불렀을 때도 레이는 날 밑에 눕혀놓고 상위체위만을 고수할 것 같았다.

웨이터가 이번에도 정중하게 들리듯 말 듯 조심스럽게 노크를 해왔다. 나는 그 와중에도 갑자기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 할 것 같아서 좀 크게 떠들어댔다.

“그러면 여기는 내가 내고 모텔비는 네가 낼 거지?”

레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오른손을 들어 집게손가락으로 ‘쉿’, 하며 입술을 오므렸다. 윙크도 깜찍하게 날리며. 그리고는 나비넥타이를 맨 몸집이 큰 웨이터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이 품격을 갖춘 몸가짐을 조심한 여자로 돌아갔다. 그녀는 나와 웨이터를 번갈아 보며 왼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늘 주던 것으로요. 고마워요.

웨이터가 나가자마자 레이는 내게 축구심판같이 경고를 날렸다.

“아이. 오빠는 참. 창피하게 그런 말, 대 놓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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