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퍼스트. -2 이야기속의 이야기 -다일연의 속물근성
심하게 욕설까지 늘어놓지는 않을 거야. 채팅은 채팅일 뿐이니까.
-너도 그런 거 좋아해?
-뭘?
-남자랑 자는 거.
-…….
-…….
-그거야 나중에 술 한 잔 먹고 천천히…….
전화번호를 서로 주고받고 통화까지 끝냈다. 목소리를 들을 땐 무척 떨리고 설레었다. 여자의 목소리도 들떴다. 마법 같았다. 단 몇 분이었지만 대화창이 사라지고 컴퓨터가 꺼진 다음에야 비로소 나 자신에게 반문했다. 방금 내가 무얼 한 거지? 나는 내일 저녁 일곱 시 역삼동 교보문고로 레이를 만나러 간다.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미쳤구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채팅으로 여자를 만나다니.
여자와 몸을 섞는다는 것. 여자와 한 침대에서 부대끼고 잔다는 것. 그 일이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상상만으로도 달아올라 몽정할 정도로 팬티 안이 축축하고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의도적으로 성의 행위를 노골적으로 밝힌 뒤에도 레이는 만남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부풀어 오르게 했다. 자신도 그 짓이 그리워 동조한 것이겠지. 채팅으로 남자를 만나러 나오는 여자라면 대개는 볼 장 다 본 거겠지만.
종일 도서관에 있자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레이를 만나러 가는 시각은 저녁때라 한참 멀었다. 성에 대한 애증이 나를 휘어잡고 도통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공책에 단 한 글자도 써낼 수가 없었다. 여자를 만나러 가야 할 때가 다가온다. 글을 써보겠다, 앉아 있는 것이 미친 짓이지. 집중되나. 영화관에 가서 영화나 한 편 보면서 시간을 보낼까.
점심을 먹을 즈음에는 레이에게서 확인 전화까지 왔다. 꼭 나올 거지? 오빠. 무슨 옷 입었어? 오빠 키는 몇이야? 잘 생겼어? 나? 나는 뭐 검정 치마에 검은색 블라우스 입었지. 떨린다고? 실은 나도 오빠랑 약속해 놓고 한잠도 못 잤어. 일이 손에 안 잡혀. 아이…. 오빠는 술 한 잔 먹고 천천히 가자니까. 실은 나도 정말 오랜만이거든. 오빠 나 잘해 줄 거지? 아. 안 되지. 지금 어떻게 바로 만나. 일이 아직 안 끝났어. 좀만 참아.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레이가 앞에 있다면 와락 껴안아 주고 싶어질 정도로 달아올랐다. 상상의 극치가 끝없이 펼쳐졌다. 통화를 끝내고서도 정신이 멍해 도서관 건물 밖 흡연실에 한동안 앉아서 레이와 갖은 짓을 벌이는 나를 부추겼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도 여자를 만나잖아. 이성을 절제 있게 내세우며 그녀 만나는 것에 정당성을 갖다 붙이기에도 서슴없었다. 레이와 나는 처음 만나는 것이지만 그래도 나름 성인이잖아. 이렇게 만나도 인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윤리는 가지지 못하는 짓이긴 했다. 가족이나 주위 아는 사람에게 떳떳하게 이 만남을 말하지 못할 일이었다. 도덕적 회의라 비난받아도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욕망으로 점철된 순간이 더 컸다. 자제할 수 없었다. 그게 필시 도서관에서 위압감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충동적이며 순간적 안위가 온통 주위를 맴돌았다.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한참 때가 멀어도 노트북을 접고 책상에서 그밖에 자질구레한 도구들을 챙겨서 공동사물함에 넣고 잠갔다. 노트북도 그렇지만 도시락을 덜렁거리면서 레이를 만날 순 없잖은가.
역삼동으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 손에 들린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머릿속은 온통 생각으로 그득 차 천근만근 무겁고 아프고 어지러웠다. 흔들리는 전동차 안이 더워서 그런지 답답하기도 했지만, 식은땀이 등짝에 흘러내려 그 짜릿함이 차가웠다.
교보문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빼곡히 진열된 수많은 책을 바라보고 돌아다녀도 초조함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여잘 만날 생각에 부풀어 있는 상태에서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글을 쓴다, 하여 일부러 레이가 만날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거는 아닐 거였다. 자신이 다니는 직장과 가까운 곳이라니 근처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레이가 어떤 일 하며 어느 직장에 다니는지 그동안 대화를 하면서 자세히 듣지 못했다. 그저 만나는 일에만 온통 집중이 되다 보니 서로에게 갖는 신뢰감이 그다지 깊지 않았다. 관심조차 없었을뿐더러 물어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남자를 만나러 나온다니까 몸매가 엄청 예쁘고 얼마나 관능적일지에만 신경이 쓰였다.
레이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면서 온 두루 빌딩 주위를 맴돌았다. 여자의 모태가 보였다. 한 여자가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 내며 라운드를 걸을 때는 저절로 눈길이 그쪽으로만 갔다. 미니스커트 사이로 확 드러난 다리와 몸에 바짝 들러붙은 옷 위로 불룩 오른 가슴을 보자마자 울컥해서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다. 레이 맞지. 역시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어. 또 다른 여자의 뒤태에 끌려 에스컬레이터의 가만히 서 있을 적에는 뒤에 바짝 붙어 서서 얼굴을 가까이서 확인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서점에서는 책장을 넘기는 여자의 실루엣만 보더라도 설레었다. 심지어 밖에서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우는 여자의 모습도 멋있었다. 그렇게 보이는 여자마다 말을 걸고 다가서고 싶었다. 레이는 저 중의 한 명일 거야. 어쩌면 지금 방금 지나쳤을 수 있어. 만날 시각은 한참 멀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주위에 지나치는 여자들이 레이의 모습을 부추겼다. 나오고 들어간 곳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여자들이 지나칠 적마다 감탄이 절로 났다. 와-. 저렇게 예쁜 여자가 레이일까. 저 여자. 오. 정말 괜찮다. 계속 여자들에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한 여자는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를 몰라 헤매다 기어이 고개를 들어 다른 곳으로 돌렸다. 레이가 저 여자 중의 한 명이라 상상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럭저럭 시간이 갔는지 드디어 레이에게서 휴대전화로 연락이 왔다. 그녀를 만난다고 하니까 심장이 뛰었다. 여자들 구경으로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고 보니 벌써 약속 시각이 다 됐다. 교보문고는 장소가 넓어서 특정한 곳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교보문고를 돌아 지하철 출구 나와서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맥도날드가 보일 거야. 그쪽에서 봐.
그렇지만 맥도날드 앞에서 레이의 모습은 나의 무지한 기대와 과도한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치마도 입고 하이힐도 신었지만 거의 검정 투피스 정장 차림이었다. 겹겹이 둘러싼 치렁한 치마에다 그나마 드러난 다리는 레깅스 타입의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위에는 가슴도 그렇게 크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 블라우스가 거북하게 보일 정도이고 얼추 보기에는 키도 나랑 보조를 맞출 정도로 거의 엇비슷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작았다. 그리고 화장도 화려하게 꾸민 정도도 아니었다. 가까이 얼굴을 맞대해도 눈 화장은 물론이고 입술에 립스틱조차 발랐는지 모를 정도로 얇았다. 과연 이 여자가 나를 만나기 위해 유혹하기 위해 나온 여자인가. 레이는 빼거나 보탤 것도 없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있는 그대로 수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