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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다.

재활치료팀 물리치료사 000

by ligdow


3월 3일 겨울의 끝자락. 사회인으로 서는 첫날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복지관으로 출근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막연한 걱정도 있었지만 목표를 이루었다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빨라졌다.


복지관은 네 개의 큰 건물과 넓은 주차장을 갖춘 규모 있는 곳이었다. 면접을 보러 왔을 때는 미처 살피지 못했지만,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곳의 크기와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건물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깊게 숨을 고르고 물리치료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문을 열어 팀장님과 첫인사를 나누었다.


“첫날이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당분간은 지켜보도록 해요. 아이들이 들어오는 모습부터 치료 과정을 차분히 살펴보고, 궁금한 건 메모해 두었다가 치료가 끝난 뒤 물어보세요.”

팀장님은 나보다 열여덟 살 많은 남자분이셨다. 조금은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사회초년생인 나를 배려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팀장님은 건물들을 오가며 직원들에게 나를 소개해 주셨다. 수십 명의 직원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거나 회의를 하고 있었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연실 허리를 숙였다. 한국0000협회 산하에는 복지관뿐 아니라 삼성전자의 하청을 받아 운영하는 전자회사가 있었고, 약 120명 정도의 장애인 직원이 근무했다. 그곳 사무실 직원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물리치료실에는 30분 간격으로 아이들이 들어왔다. 우리 치료실도 실습 때 보았던 소아물리치료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낯설지 않았다. 가운데는 파란색 넓은 치료 매트가 있고(아이들이 걸터앉았을 때 발이 닿는 높이) 한쪽 벽면은 거울이 있었다. 곳곳에는 다양한 치료 도구와 장난감들이 놓여 있었다.


일곱 살 뇌성마비 남자아이를 시작으로 시간에 맞춰 차례로 아이들과 보호자들을 만났다. 오후 세 시 무렵, 유모차에 앉은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치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얗고 동그란 눈과 통통한 볼살이 귀여운 그녀, 혜미와의 첫 만남이었다.


“선생님이 오늘 새로 오신 물리치료사 선생님이세요? 제 이름은 김혜미예요. 저는 다섯 살이고요.

생일은 5월 27일이에요. 꼭 기억해 주세요.”


매트 위를 기어 다니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녀의 밝고 사랑스러운 모습 덕분에 첫날의 긴장은 어느새 사라졌다.




2주 동안은 팀장님의 치료 과정을 지켜보며 배우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평가지와 progress note를 확인하며 파악하려 노력했고,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 치료 중 반응을 이끌어내는 방식, 보호자와의 소통까지 치료사의 역할이 단순한 기술에 머무르지 않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실습 때는 관찰자였지만 이제는 치료사로서 직접 매트 위에서 아이와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팀장님이 아이와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치료가 끝난 후에는 그날 치료했던 부분과 내가 궁금했던 점을 팀장님과 나누며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3주 차부터는 본격적으로 치료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팀장님이 맡던 환자 중 절반은 내가 치료를 맡았고, 나머지 절반은 대기 중이던 아이들을 배치했다. 치료가 끝난 뒤에는 보호자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로는 전화로 아이의 하루와 컨디션을 확인하며 치료에 참고했다.


팀장님은 세심하게 이끌어 주셨고, 실습 시절 도움을 주셨던 병원 선배에게서도 힘이 되는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팀장님이 보호자들에게 상황을 미리 설명하고 앞으로의 치료에 대해 양해를 구해 주신 덕분에, 아이들과의 첫 만남은 예상보다 훨씬 부드럽게 시작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아물리치료만이 내 업무의 전부는 아니었다. 재활치료팀에서 시행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었고, 나는 그 업무들을 맡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1. 매주 목요일 오후 E대학병원 재활의학과 과장님 초빙 관련: 장애 진단과 등급을 받는 이용자들을 관리하고, 이후 서류를 정리해 구청에 발송하는 작업.


2. 매주 목요일 오전 치과 진료:

K대학병원 치대 교수님들과 치위생사 선생님들의 일정을 조율하고, 장애인 이용자들의 진료 예약과 일정 관리. 진료에 필요한 물품 구입과 진료실 관리도 포함되었다.

(삼성전자와 삼성복지재단은 ‘작은 나눔 큰 사랑’이라는 슬로건으로 우리 복지관에 장애인 치과진료실을 세팅해 주었다. 충치 치료, 발치, 스케일링 등 기본적인 치료를 했는데 이용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즉, 자원봉사자 분들은 오셔서 치료만 하시고 나머지는 내 업무였다.


3. 계약직 언어치료 선생님 관련 업무:

인건비 결제와 언어치료실 운영에 필요한 예산 집행. 예를 들어 물품 구입 시 영수증을 받아 결제하고, 이후 사업보고서와 계획서 등 서류 업무를 처리한다.


4. 편집위원: 2개월 단위로 발행되는 우리 복지관의 기관지 편집에 참여.


5. 타 부서 업무 지원(팀장님과 교대로)

-조기교실(장애아동 유치원 개념의 교육) 캠프

-생활체육팀: 지체장애 청소년 체력평가 의무 분류

(중고등학교 체육 점수와 관련)

-장애인•비장애인 청소년 여름/겨울 캠프 지원


정리하자면, 나는 물리치료실 업무뿐만 아니라 재활치료팀에서 진행되는 여러 프로그램들의 전반적인 담당자가 된 셈이었다. (물론 복지관마다 특성이 있지만 다른 복지관 치료사 중 이렇게 다양한 업무를 맡은 경우는 근무 기간 내내 보지 못했다.)

거기에 타 부서 업무 지원까지... 그야말로 뜨아~였다!


팀장님께 설명을 들으면서 정신이 아찔했다.

“이걸 제가 해야 한다고요? 이 많은 업무를요?”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서 뒤엉키며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다음 주부터 예정된 소아물리치료와 중추신경계 관련 학회 공부 일정이 떠올라 막막함과 압박감이 더해졌다.


‘닥치면 할 수 있다. 이왕 할 거 즐겁게 한다.’

그동안의 내 삶의 방식이 이번에도 통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사회초년생으로 이곳은 직장이었다...






장애인복지관은 장애인의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직업적 자립을 돕는 장애인 이용시설이다. 등록 장애인뿐 아니라, 장애가 의심되는 사람이나 그 가족, 보호자도 이용할 수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당시 서울시에는 약 10개 정도의 장애인복지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건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며, 예산 집행과 보고 등 모든 업무에서 근거 자료를 필수로 갖추어야 했다. 10원 단위의 지출도 영수증을 첨부해 결제해야 했고, 사업보고서와 사업계획서 작성, 회의와 평가도 중요한 일과였다. 이용자 명단 작성 역시 기본으로, 예상 인원과 실제 참여 인원을 꼼꼼히 기록하는 것이 필요했다. 즉, 서류 업무가 산더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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