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목표를 실천하며
소아물리치료사 2년 동안의 치료 경험과 학회·연수 등 배움을 통해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재활치료팀의 다양한 업무에도 자연스럽게 적응하며 경험을 쌓아가던 중, 대학 때부터 마음속에 품어왔던 두 번째 목표를 실천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내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대단한 계획이나 잘난 척이 아니라 마음속에 늘 있던 단 한 문장 그것이었다. 그래서 임상 경험을 쌓은 뒤 비인가 장애인 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 20대 삶의 목표 중 두 번째가 되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발품을 팔고 수소문 끝에 송파구 오금동에 위치한 O0의 집을 찾았다. 그곳은 건물 3층에 있었고, 넓은 거실과 작은 방 하나, 책상 하나가 놓인 좁은 사무 공간, 욕실 그리고 거실과 연결된 작은 주방이 있었다. 유아부터 성인까지 버려졌거나 맡겨진 스무 명 가까운 중증 장애인 분들이 생활하고 있었고, 직원은 원장님 한 분과 아주머니 한 분뿐이었다.
“저는 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하는 물리치료사입니다. 자원봉사를 하고 싶습니다.”
“...... “
“화•목요일 저녁에 민희(6세)와 정혁(7세)이를 치료하겠습니다.”
“편한 대로 하세요.”
그게 다였고, 원장님의 대답에는 퉁명스러움과 귀찮음이 섞여 있었다.
화•목 퇴근 후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도착하면 7시, 작은 방에서 두 아이를 만났다. 중증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민희(가명)와 정혁(가명)은 심한 경직과 관절 구축으로 움직임이 많이 제한적이었다. 관절 가동 범위를 넓혀주고 똑바로 누운 자세에서 뒤집기와 고개 들기를 목표로 치료했다. 치료실의 매트가 아닌 딱딱한 바닥이라 무릎이 아프고 자세도 불편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아이는 내가 오는 시간을 기다렸고, 내가 들어서면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퇴근 뒤라 몸은 피곤했지만, 그 웃음 덕분에 다시 힘이 났고 그곳에 가는 일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학회나 공부 일정이 있으면 다른 요일로 조정해 아이들과의 약속만큼은 꼭 지키려 했다.
치료가 끝난 뒤 나는 바로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저녁 시간, 아주머니가 홀로 장애인 분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까지 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조금씩 손을 보탰다. 그렇게 두세 시간을 함께 보내며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날아다녔다.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복지관에 자원봉사를 오시는 치과대학 교수님께서 치약, 칫솔, 가글 제품을 각각 한 박스씩 세 박스를 갖고 오셨다. 팀장님은 내가 자원봉사 다니는 것을 유일하게 알고 계셨는데,
“그곳에 전해주면 참 의미 있게 쓰일 거야.“ 라고 말씀해 주셨다. 배려해주신 팀장님과 팀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퇴근 후 택시에 물품을 싣고 OO의 집으로 향했다.
마침 원장님이 계셔 오랜만에 얼굴을 뵐 수 있었다.
사정을 말씀드리자 원장님은 내 손을 꼭 잡으시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셨네요. 오늘 아침에 치약이 다 떨어져서 얼마나 난감했는지 몰라요.”
겨울이라 양말 장사는 시원치 않고, 후원마저 줄어들어 한숨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하셨다. 많은 이들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 매일같이 필요한 물품은 늘 모자랐다. 내가 가져간 물품을 보며 큰 위로가 된다며 기뻐하시던 그분의 눈가에 이내 눈물이 고였다.
“선생님, 여기 오신 지 얼마나 됐나요?”
“1년쯤 됐습니다.”
“죄송한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원장님은 대부분의 봉사자들이 한두 번 오다가 연락 없이 그만두기에 누가 온다고 해도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 역시 그저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거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1년 가까이 꾸준히 다녔다는 말을 듣고는 미안해하면서도 너무 고맙다고 내 손을 잡으셨다.
그해 5월, 또 다른 일이 있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두 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장애인 낚시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면서 29인치 TV를 선물로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TV를 어떻게 의미 있게 사용할까를 고민하시던 중 문득 내 얼굴이 떠올랐다고 했다. 예전에 내가 시간이 늦어 한 분의 차를 얻어 타고 OO의 집 앞에서 내린 일이 있었는데, 그때를 떠올리신 것 같았다.
일요일 낮, 복지관에서 한 분의 차에 TV를 싣고 OO의 집으로 향했다. 3층까지 그 무거운 것을 함께 계단으로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때마침 원장님이 계셨고 우리가 TV를 들고 들어서자 원장님은 지난 1월과 마찬가지로 내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어머나, 하나님이 또 천사를 보내셨네요.”
“작은 방에 TV가 있으면 식구들이 지낼 때 덜 무료할 것 같아 기도하고 있었어요.”
함께 간 두 분께 감사 인사를 하시며 원장님은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셨다.
두 분은 직장을 다니면서 우리 복지관 체육관으로 운동을 다니시는 이용자였다.(한 분은 척추장애가, 다른 한 분은 왜소증 장애가 있었다)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다가 친해져 인연이 이어졌지만, 내가 결혼 후 퇴사를 하고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연락이 끊어진 지 20년이 되었다.
3년 전 가을, 문득 그분들이 생각나 수소문 끝에 그날 차를 운전하셨던 한 분께 전화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000 씨. 저는 서울 000에서 근무했던 물리치료사 000입니다. 혹시…”
“선생님, 당연히 기억하죠! 와, 이게 얼마만이에요. 잘 살고 있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분은 말을 이어가셨다.
OO의 집에 TV를 전달했던 일은 흐릿하게 기억하시지만, 내가 늦었을 때 두 번이나 그곳까지 태워다 주셨던 일은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하셨다. 각자 중요하게 기억하는 순간이 다르다며 함께 웃고, 그간의 근황을 나누며 한참 동안 통화를 했다. 현재 장애인체육회에서 근무 중이고 그간 잘 지내오신 걸 확인하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고마움이 밀려왔다.
자원봉사가 흔히 남을 돕는 행위로 이해되지만, 내가 OO의 집에서 경험한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물품을 전하거나 아이들을 치료하는 일을 넘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건네는 순간마다 책임감과 뿌듯함을 느끼며 마음이 조금씩 자라났다.
내가 한 작은 행동이 원장님이나 장애인 분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도 깊은 보람과 감사함을 느꼈다. 결국 자원봉사는 나눔의 행위이자,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하게 하는 상호적인 경험이었다.
치과 교수님과 두 분의 지인, 그리고 자원봉사에서 만난 모든 분들은 내 삶의 퍼즐 조각이 되어주셨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감사와 따뜻함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1년 반 정도 이어진 OO의 집에서의 봉사는 시설이 다른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따뜻한 기억은 여전히 소중하게 남아 있다.
*1회 차 글의 시작 부분*
그 즈음, 목표를 향한 발걸음과 함께 심장도 즐겁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