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소프트볼 대회 업무 지원
199*년 11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장애인 소프트볼 대회에 우리 복지관 소프트볼팀이 참가했다.
나 역시 직원 자격으로 그 일정에 동행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장애인 소프트볼이 대중화되어 있었다. 미국팀까지 초청해 며칠 동안 경기가 진행될 만큼 규모와 수준이 높았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그 당시 우리 복지관 팀이 유일했다. 20대에서 50대까지의 남성 지체장애인으로 구성된 그 팀은 매년 일본 대회에 초청을 받았다.
선수들은 대회를 앞두고 두 달가량 꾸준히 연습을 이어갔다. 주로 학교 운동장에서 훈련을 진행했는데 근처 풍납중학교에서 모일 때도 있었고 어느 때는 멀리 이화여대 운동장까지 가기도 했다. 운동장 대여가 쉽지 않아 담당자들이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소프트볼은 복지관의 여러 스포츠처럼 생활체육 개념으로 운영되었다. 평소에는 몇몇 선수들이 자유롭게 모여 운동을 즐기다가 대회를 앞두고 일정 기간 집중 훈련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선수층이 두껍지 않아 정식 경기에 출전하려면 일정 수준의 체력과 경기 감각을 유지하는 훈련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방의 한 청각장애인학교 야구부에서 투수 몇 명을 초빙해 함께 훈련을 진행했다. 청각장애인 선수들이라 수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그 학교의 야구부 감독님께서 직접 오셔서 훈련과 연습 경기를 함께 해주셨다. 덕분에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일본 대회 출전을 준비할 수 있었다.
생활체육팀이 담당하는 업무였고, 재활치료팀의 업무 지원(물리치료사) 차원에서 내가 참여하게 되었다.
본래는 2박 3일 출장 일정이었지만 나는 자청해서 주말 훈련에 참석했다.
신속한 경기 진행을 돕기 위해서라면 공이라도 주워 나르며 현장을 지원하고 싶었다. 또한 아무리 업무 지원 차원이라 해도 일본에 가서 잠깐 얼굴만 비치고 돌아오는 것은 선수들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를 대신해 대타로 나선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이후 처음 잡은 야구 방망이.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심장을 두드렸다.
프로 야구 선수들처럼 투수를 노려보는 눈빛과 두세 번 방망이를 휘두르는 포즈를 잡자 선수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000 선생님 홈런 칠 기세네요. 수비수들 더 뒤로 가야겠어요.“
야구와 달리 소프트볼은 투수가 팔을 크게 휘둘러 아래쪽에서 던진다. 그 투구 동작 속에서 공이 부드럽게 떠올라 날아왔다. 공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그 찰나에 세상이 잠시 멈춘 듯했다.
헛스윙이 이어지다가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상황에서 공을 3루 쪽으로 밀어쳤다. 사실 안타성 타구는 아니었지만 전력 질주를 해서 세이프를 만들었다.
아... 이 짜릿함이란.
홈런이라도 친 것 마냥 폴짝폴짝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대주자로, 외야수로, 응원단장으로.
그렇게 내 역할을 찾다 보니 주말이 기다려졌다.
훈련이 끝난 후 운동장에 모여 그날의 경기를 이야기하는 순간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웃음과 땀으로 물든 그 시간 속에서 나도 모르게 팀의 일부가 된 듯한 소속감을 느꼈다.
연습 때와는 달리 후쿠오카 경기장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높고 단단한 벽이었다.
목이 터져라 응원하면서도 안타까움에 눈물이 날 뻔했다. 선수들이 기가 죽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까 하는 조마조마함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 팀 선수들은 온 힘을 다했지만 결과는 두 경기 모두 패배였다... 그럼에도 선수들은 의연한 표정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일정을 마무리하며 저녁에 선수들과 함께 숙소 밖 맥주집에 모였다. 그간의 땀과 노력 그리고 아쉬움을 투명한 잔에 가득 채워 마셨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그렇게 우리는 내년을 기약했다.
업무 지원으로 처음 만난 그분들과의 인연은 내게 특별했다. 연습과 경기 준비 과정 속에서 그들과 나눈 시간은 또 하나의 값진 경험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장애인 스포츠에 대한 사회와 사람들의 인식 부족, 열악한 환경 그리고 지원의 부재라는 현실을 새삼 깨달았다.
또한 그들은 국가대표도 아니었고, 돈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우리 복지관과 초청해 준 일본 측에서 비용을 지원했지만, 소프트볼을 향한 순수한 마음 하나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다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복지관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달리는 그들은 소속감과 책임감으로 최선을 다해 연습했고 경기에 임했다. 서로의 꿈을 함께 짓는 동료였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후쿠오카에서 보낸 2박 3일은 분명 특별한 시간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부 장면들은 운동장에 흩날렸던 모래 먼지처럼 희미하다. 대신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선수들의 파이팅 소리와 단체사진 한 장이다.
그때 친해졌던 선수 중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은 1년 반이 지난 뒤, 내가 자원봉사하던 곳에 TV를 기증해 주신 두 분 중 한 분이 되었다. 그 인연은 후쿠오카에서의 시간이 단순한 경기 출전 이상의 의미였음을 깨닫게 했다. (7회 차 ‘작은 나눔 큰 기쁨’ 글을 참고해 주세요)
그 후, 물리치료실이라는 공간에 머물던 나의 시선은 장애인 복지로 조금씩 확장되었다.
그 중심에는 ‘박찬오’ 그가 있었다.
*사진: 관장님, 사무국장님, 생활체육팀장님, 나
우리 팀 선수들과 일본 관계자 분들 및 그들의 자녀들.
나는 여자 아이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