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목표 수정은 불가피했다.
대학에 입학한 뒤 노트에 적어두었던 세 번째 목표는 특수교육과 대학원에 진학해 훗날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함께 생활하는 통합 유아시설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관련 과목을 이수하고 기관 운영을 위한 자격증도 준비했지만(몇 년 뒤 그 자격증은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아이들을 교육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지도하기 위해서는 특수교육에 대한 깊이 있는 학습이 필요했고, 치료와 교육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통합 교육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의 목표는 조금은 막연한 꿈에 가까웠다. 하지만 현장에서 아이들의 부모들을 만나면서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생각은 점점 구체적인 필요로 다가왔다. 경증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이가 유아기에 접어들면 교육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장애 정도가 크지 않아 특수학교에 보내기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일반학교에 보내자니 비장애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겪게 될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은 아이가 학령기에 들어가기 전에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시기부터 비장애 또래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생활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기관이 매우 드물었고 입소 또한 쉽지 않았다.
경력 5년 차가 되던 무렵 서울의 특수교육과 대학원 두 곳에 원서를 내고 면접을 준비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목표를 현실로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대학의 면접장에서 들은 말은 예상 밖이었다.
“치료사가 왜 교육을 하려고 하죠? 우리 학교에도 전공 학생들이 많은데요.”
두 번째 대학에서도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냥 지금 하시던 일 계속하시면 되잖아요.
치료사가 굳이... 왜…?”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마치 내가 걸어온 시간과 고민 그리고 직업에 대한 진심이 단숨에 가볍게 평가절하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들이 내 마음을 알 리는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 선택과 열망 자체가 부정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공부하려고 했는데, 이런 말씀을 들으니 이 학교에서는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네요.”
두 곳 모두에서 면접을 끝까지 마치지 않고 말 그대로 중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버렸다. 짜증이 섞여 있었지만 동시에 묘하게 후련하기도 했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지금도 내 일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데, 굳이 이런 말을 들어가며 여기에 와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어쩜 두 학교 모두 같은 반응일 수 있을까?
진짜 어이없다.’
나는 이미 내 일에 충분히 만족하고 집중하고 있었다. 평일에는 치료실에서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고, 저녁과 주말에는 관련 공부와 교육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 계통 사람들은 “소아 물리치료사는 탤런트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단순히 치료 기술만 갖추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독이고 상황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이의 호흡과 표정, 움직임을 살피며 치료를 이어갔고, 필요할 때는 노래나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때로는 흐트러진 분위기를 단호하게 정리하며 치료의 흐름을 유지했다. 그렇게 쌓인 시간 속에서 현장 감각과 치료의 깊이도 자연스럽게 단단해졌다.
아이들과의 치료는 대체로 매트 위에서 1:1로 이루어졌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과 가까이 접촉하는 만큼 내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신경 쓰는 편이었다. 행여 나 때문에 치료가 중단되거나 치료 일정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혹시 아이의 옷이나 얼굴에 묻을까 화장은 하지 않았고, 아이가 다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액세서리도 착용하지 않았다. 소아 물리치료사라면 누구나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과식을 하면 몸이 둔해서 집중력이 떨어질 수 있어 점심도 늘 적당히? 먹었다. 더 먹고 싶어도 참았으니 한 끼 식사라기보다 치료를 위한 최소한의 연료에 가까웠다. 하루의 마지막 치료가 끝나면 피로와 허기가 한꺼번에 밀려왔지만 아이들에게 온전히 집중했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
또한 누구를 만나든 대화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예쁘다”, “사랑스럽다”는 말은 거의 입버릇처럼 붙어 있었고, 하루의 기쁨과 고민 역시 대부분 아이들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일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다. 삶의 중심이었고 가장 빛나는 기쁨이었다.
그랬다. 치료실에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속에서 그리고 재활치료팀의 다양한 업무를 해나가며 이미 충분한 의미와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두 번째 목표였던 비인가 장애인 시설에서의 자원봉사도 이루지 않았던가.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원 진학이라는 목표를 잠시 내려놓고 눈앞의 아이들에게 더 집중하기로 했다. 치료사로서의 내 일에 충분한 만족을 느끼고 있었고,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길이 아니라 현재의 자리에서 전문성을 더 단단히 다져가는 일이라 판단했다. 어쩌면 긁힌 자존심을 애써 숨기듯 빠르게 목표를 수정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혜미를 비롯해 진행성 근이양증으로 몸이 불편한 남학생을 몇 년째 치료하고 있었다. 근육병은 아직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근본적인 치료법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치료의 목표는 병의 진행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즉 현재의 근력과 기능을 최대한 유지하고 진행에 따라 나타나는 증상들을 조절하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 복지관에는 매주 E대학병원 재활의학과 과장님이 오셨다. 나는 근육병 아이들의 치료 방향에 대해 자주 조언을 구했고, 과장님이 제공해 주신 자료를 참고해 치료에 적용해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근육병 관련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부하고 경험한 것들을 이곳에서만이 아니라 치료실 밖에서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할 수는 없을까?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재가복지서비스 사업을 담당하던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에 성실했고, 이용자들을 대할 때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서로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5년 가까이 한결같은 태도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신뢰가 쌓여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용기를 내어 물어보기로 했다.
“선생님, 재가복지서비스 이용자 중에 근육병 진단을 받으신 분들도 계시나요?”
“네, 몇 분 계세요. 그런데 왜요?”
“제가 혹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요.”
그 대화를 시작으로 나는 또 하나의 자원봉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1회 차 글에서 이야기했던 나의 목표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돌이켜보면 대학원 진학 멈춤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때는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지금, 현재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고 아직 이십 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나눔으로 심장이 조금 더 즐겁게 뛰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