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이번 글은 11화 ’지금, 현재에 집중하기‘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번에도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퇴근 후 약간의 시간을 내면 되는 일이었다.
“재가복지서비스를 이용하시는 분들 중에 근육병 진단을 받은 분이 계신가요?”
“집에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근력 운동이나 관절 운동을 지도하고, 보호자나 당사자와 상담도 함께 진행하는 형태의 자원봉사를 하고 싶은데요. 근이양증에 대해 정리한 자료도 나눠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첫 방문만 선생님께서 도와주시면 이후에는 제가 혼자 다닐 수 있어요. “
“네? 진짜요? 선생님이 따로 시간를 내신다는 거예요? 이용자분들께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겠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재가복지서비스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용자 중 진행성 근이양증으로 몸이 불편한 분이 네 분 계시다고 했다.
사실 이 일은 공식적인 업무 범위 밖이었고 담당자 입장에서는 번거롭고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선뜻 함께해 준 것은 장애인 이용자들을 향한 진심과 직업적 신념이 그분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 방문은 약속대로 담당 선생님이 함께 해주셨다.
선생님이 미리 보호자와 이용자에게 방문 취지를 설명해 둔 덕분에 나는 부담 없이 첫 만남을 기대하며 나섰다.
첫 번째 방문 가정에서 마주한 현실은 마음이 너무 아플 만큼 막막하고 버거웠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고 병원에 정기적으로 다니는 일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어머님은 아이의 질환에 대해 정보나 이해를 갖고 있지 못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벅찬 나날이라는 사실이 한눈에 느껴졌다.
노크를 하고 인기척을 한 뒤 방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작은 움직임으로 가득했다. 벽과 천장을 따라 바퀴벌레들이 쉼 없이 기어 다녔다. 그 한가운데서 아이는 벽에 기대어 앉아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여름이라 짧은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과 다리에는 벌레에 물린 자국이 선명했고 얼굴에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이의 웃음이 더 밝을수록 이 공간의 냉혹한 현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아이는 몸에 붙은 벌레를 스스로 떼어내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우리를 보며 해맑게 웃어주는 열두 살 남자 아이...
그 모습을 보며 내 팔과 다리를 기어오르는 벌레를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히 최대한 어쩌다 한 번씩만 그저 손끝으로 쓱 밀어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일하러 나간 낮 동안 아이는 노트북 앞에서 조용히 하루를 보냈다. 마우스 위에 힘없이 얹힌 손끝이 화면 속 세상과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였다. 작은 손의 미세한 움직임 속에서 아이는 세상과 마주하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호흡과 자세 유지 방법부터 알려주었다. 가능한 만큼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오래 내쉬는 연습을 매일 해보도록 했다. 테이블 위에 탁구공을 올려놓고 입김으로 밀어내는 간단한 운동도 가르쳐주었다. 또한 앉아 있는 시간이 긴 만큼 베개와 이불을 이용해 몸통을 지지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수행할 수 있는 동작이 많지 않지만 가능한 범위 안에서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알려주고, 이런저런 고민을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후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집주인에게 바퀴벌레 상황을 전달했지만, 다세대주택이라 각 가정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문제로 연막 살충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방문할 때마다 바퀴벌레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고, 매번 아이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나보다 아이를 보호? 하려고 애쓰고 또 애썼다.
두 번째 방문한 가정의 아이는 체격이 작고 잘 웃는 아홉 살 여학생이었다. 진행성 근이양증 진단을 받은 이후로는 별도의 치료를 받거나 병원에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형편도 어렵고, 병원에 가도 의사가 별 얘기도 안 해주고 가라고 하니까요. 갈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아직은 걸을 수 있었지만 항상 까치발로 디디며 자주 넘어져 걱정이 많으셨다.
아이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고 집에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근력 운동과 바른 자세 유지 동작을 알려드렸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고 어머니가 옆에서 따라 할 수 있도록 지도한 후에 간단한 그림으로 동작을 그려 벽에 붙여두었다. 가능하면 시간을 정해 어머니와 함께 운동하기를 권했고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다.
또한 부모님이 질환의 특성과 진행 양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계셨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설명드렸다. 이후 방문 때마다 운동 수행 여부와 변화된 상태를 확인했고, 중간에 궁금한 점이나 불안한 상황이 생기면 언제든 전화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다음으로 만난 두 이용자는 10대 후반의 남학생들이었다. 이동은 휠체어로 가능했고(어머님이 안고 업어서) 대부분의 시간은 침대에 누워 지내고 있었다.
체격이 성인에 가까워 어머니들이 혼자 돌보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고, 두 분 모두 허리 통증과 체력적인 어려움을 호소하셨다. 그럼에도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는 한순간도 허투루 하지 않으려는 진심이 보여 더 안타까웠다.
누운 자세에서 할 수 있는 관절 가동 범위 운동, 관절 구축을 예방하기 위한 스트레칭 그리고 앉은 상태에서 할 수 있는 호흡 운동 방법을 알려드렸다.
어머니들이 치료사 역할을 하며 꾸준히 운동을 주도해야 했기 때문에 손의 위치와 힘의 방향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무엇보다 어머니들께서는 이 질환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는 점과,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상태에서 점점 진행되는 질환을 지켜봐야 하는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외래 진료 때 면담 시간은 1분 남짓에 불과했다)
그래서 방문 때마다 운동 지도뿐 아니라, 그동안 쌓아둔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곤 했다. 퇴사 이후에도 한 어머니와는 메일과 전화로 소통하기도 했다.
네 가정을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며 아이들의 운동 수행을 점검하고 부모님과 상담을 이어갔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현실적인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고 마음만으로는 충분히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다.
특히 초등학생 두 가정을 방문하면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부모님들에게 내가 개입하는 것이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마음만 앞설 뿐 실제로 도움이 되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던 자원봉사였지만 그동안의 상황과 내 한계를 담당 선생님께 솔직히 말씀드렸다.
“선생님, 제가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아요. 어머님들께는 필요하실 때 연락 주시라고 말씀드렸어요. 원하시면 제가 또 방문할 수도 있고요. 아쉽고 죄송하지만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따뜻하게 답해주셨다.
“아니에요. 선생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업무도 아니고 자원봉사해 주신 선생님의 진심은 제가 다 알아요. 지금까지 애써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
진행성 근이양증을 비롯한 근육병은 가혹했다. 치료법이 없는 상태에서 점점 악화되는 아이들의 몸 상태와 가정의 현실적인 어려움은 너무나 무겁고 아픈 현실이었다. 6개월 동안의 방문과 상담을 통해 마음만으로는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현실을 절실히 느꼈다.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질병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그가 처한 사회적 조건의 결과”라는 문장을 만났을 때 문득 그 시절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진료와 치료를 이어가지 못했던 것은 단순히 가족의 선택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지탱할 사회적 여건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대했던 만큼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그 시간을 통해 ‘도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진심으로 돕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몸과 마음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삶의 조건과 현실까지 함께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치료실에서 아이와 부모님을 마주하며 그들의 치료와 삶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내가 몇 년 동안 치료하던 남학생(진행성 근이양증)이 병원에 입원...... 가슴이 아리고 먹먹한 가을을 보냈다.
그해 1월 발행된 복지관 연구지다. 진행성 근이양증을 주제로 현장에서 마주한 문제 의식과 그 속에서 얻은 배움을 기록했다. 부족함이 아쉽지만 그 시절의 고민이 담긴 소중한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