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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한 길, 첫걸음

실습생에서 치료사로

by ligdow


대학 생활 마지막 2학기에는 세 곳의 병원에서 실습을 했다. 학교에 실습 병원을 신청한 결과, 내가 희망했던 A대학병원과 S재활원에 배정되었고 나머지 한 곳은 K종합병원으로 결정되었다. 각 병원에서는 재활치료팀장님이나 실장님이 실습 점수를 평가하셨고, 학교 교수님들은 현장 점검을 위해 병원을 방문하여 실습생들의 활동을 확인하셨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세 달의 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실습을 앞두고 처음 가운을 받았을 때의 설렘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학교에서 단체로 주문한 하얀 가운의 왼쪽 가슴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유니폼이 주는 의미랄까, ‘학생 치료사’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 아침 단정한 옷 위에 가운을 걸칠 때면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이제는 강의실에서 머리로만 배우던 학생이 아니라 치료 과정을 집중해 배우는 책임감을 느끼며 환자 앞에 섰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아직 어색했지만 배우고자 하는 열망만큼은 여전히 충만했다.




첫 번째 A대학병원은 당시 드라마 종합병원 덕분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시설도 훌륭했고, 재활치료실 선생님들은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실습생을 성실히 지도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곳에서는 소아재활치료실, 성인재활치료실, 전기치료실, 병동치료뿐만 아니라 중환자실과 소아중환자실까지 다양한 영역을 경험할 수 있었고, 모야모야병이나 길리안바레증후군 같은 흔치 않은 질환의 환자 치료 과정도 볼 수 있었다.


선생님들은 치료가 끝난 뒤에도 스터디와 케이스 토론을 이어가며 환자 치료에 최선을 다하셨고, 우리 실습생들은 그 속에서 하루하루 조금씩 배워 나갔다. 첫 달에는 모두 긴장했고 서로 처음 보는 사이라 친해지기 쉽지 않았지만, 실습 마지막 날 함께 볼링을 치며 웃고 떠든 시간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두 번째 S재활원은 생활시설과 치료실이 함께 갖춰진, 당시로서는 최고의 시설이었다.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환자가 생활하며 재활치료를 받았고, 각 치료실은 전문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물리치료, 작업치료, 언어치료, 전기치료 등 선생님들은 실습생들에게 치료 도구 사용법과 기본 원리를 친절히 알려주셨고, 하루가 끝나면 실습생들끼리 모여 배운 것을 나누며 서로의 배움을 채웠다.


특히 소아치료실에서는 소리를 지르거나 우는 아이 혹은 경직이 있는 아이를 달래면서 집중하는 치료사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치료는 뇌병변과 같은 신경학적 장애를 가진 어린 환자들의 발달 단계와 기능적 필요를 세밀히 관찰하고 환자에 맞춰 접근하는 집중적인 과정이었다. 사실 그때는 ‘과연 내가 저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저렇게 환자에게 집중하며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몇 달 뒤에는 나도 소아치료실에서 일하고 싶다는 기대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실습한 K종합병원에는 활발한 남자 치료사 선생님들이 많았다. 그분들은 실습생들에게도 친근하게 다가와 치료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나누어 주셨고, 내 기억으로는 실습생들을 가장 편하게 대해주신 곳이었다. 선생님들은 평소에도 “일단은 취직하면서 배우는 거다. 지금은 보면서 현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은 언제든 질문해도 된다.”라며 실습생들에게 자주 조언을 해주셨다.


주 2~3회 저녁에는 회식을 하며 함께 식사하고 많이 웃었다. 사실 실습을 다니면서 치료사 선생님들과 회식을 한 것은 세 번째 병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실습생들은 맛있는 고기를 자주 먹을 수 있어 좋았고,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을 보며 머지않은 미래의 우리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느 날은 회식을 하면서 길동 사거리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가게 되었는데, 같이 실습한 타 학교 남학생이 갑자기 브루스를 추자고 손목을 잡았다.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치며 “내가 왜 브루스를 추냐, 너랑 결혼할 것도 아닌데!”라고 말했고, 그 친구는 너무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뒤 “조선시대 여자냐?”라며 상기된 얼굴로 어이없어하던 그 친구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음 날, 그 친구는 창피했던 마음 때문인지 나에게 쌀쌀맞게 대하며 말했다.

“너 재수 없어!”

평생 기억에 남을 한 마디였다.



세 곳의 병원 실습을 거치며, 나는 학교에서 배운 이론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조금씩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론이 실제 환자에게 적용되는 방식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책으로만 이해했던 원리와 실제 치료사의 손길, 환자의 반응, 치료 환경이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은 교과서에서 본 것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관찰하고 질문하며 치료사의 자세와 방법을 세세히 지켜보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치료사의 길로 들어서는 느낌을 받았다. 서툴고 미숙했지만, 하루하루 배우며 ‘내가 선택한 길이 틀리진 않은 것 같다’는 안도감과 기대가 자리 잡아갔다.





실습이 끝난 뒤에는 기말고사를 치르고 곧바로 국가고시 준비에 매달렸다. 선배들이 남겨준 족보와 타 학교에서 얻은 자료들을 과 동기들과 나누며,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2월, 졸업과 함께 면허증을 취득한 나는 원하는 장애인 복지관에 지원할 수 있었다. 재활원과 복지관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던 교수님께서 정보를 알려 주셨고, 추천서를 받아 지원했다.


면접은 2월 20일에 치러졌고, 며칠 뒤 합격 소식을 들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에? 이제 진짜 물리치료사가 된 거야?”

그렇게 벅찬 설렘으로 맞이한 첫 출근은 3월 3일이었다.


직장인이 된다는 설렘과 기대가 컸지만, 동시에 막막함과 두려움도 뒤따랐다. 실습에서는 관찰과 보조가 주를 이루었기에, 과연 내가 치료사로서 환자와 아이들을 직접 마주하며 집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마침내 현실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해 여름부터 마음속에 품어온 목표, 장애인 복지관에서 일하는 꿈이 이제 내 손끝까지 이어졌다. 이 순간을 위해 간직해두었던 설렘이 폭죽처럼 터지고 성취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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