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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방울로 모은 등록금

여름 방학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

by ligdow

1994년, 대학 첫 방학을 맞아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두 달 동안 농사일을 도우며 부모님께서 주시는 등록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도시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시골의 일손 부족은 엄연한 현실이었고, 농사일을 돕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집 앞 밭과 마을 안쪽 정 씨 아저씨네 옆 우리 밭에서 풋고추를 재배했다. 7월부터 9월까지 이틀에 한 번꼴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고추를 따서 팔았다. 풋고추 농사는 여름 농사의 중심이자 일 년치 주된 수입원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농사일에 적응이 빠르고 일머리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은 언니보다 나를 더 자주 불렀다. 일을 잘하면 더 많이 시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렇게 일하다 보니 농사일이 점점 재미있어졌다. 여덟 살 때부터 이런저런 일들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호미질과 낫질을 특히 좋아했다.


호미 끝으로 땅을 파 풀을 뽑아낼 때, 땅속 깊이 뻗은 뿌리가 온 힘으로 버티다 이내 스르르 풀리는 순간이 있다. 그 짧은 저항과 항복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왼손에 풀 한 줌을 움켜쥐고 낫을 비스듬히 세워 밑동을 스칠 때, ‘싸삭‘ 하는 소리가 여름 바람처럼 풀 사이를 스쳐간다. 아마도 그 순간들이 결국 내가 이기는 게임이어서 더 달콤했는지도 모르겠다.


고추 작업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해가 질 무렵이면 아빠와 함께 논두렁과 개울가에 난 풀을 베어 경운기에 싣고 돌아왔다. 아빠가 외양간 앞에 경운기를 세우면 나는 얼른 내려 풀을 한 아름씩 안아 소 여물통에 넣어줬다. 싱그러운 풀 냄새가 여물통 위로 피어오르고, 소들은 넓적한 이빨로 풀을 이적이며 여름 저녁의 만찬을 즐겼다. 그걸 보고 있으면 흐뭇한 미소가 저절로 번졌다.


마을 안쪽 고추밭에 갈 때는 깨끗이 씻어 말린 빈 비료포대 수십 장과 마실 물, 밭에서 딴 참외나 요깃거리를 챙겨 경운기를 탔다. 밭에 도착해 끝없이 늘어선 고추섶을 바라보면, 한숨이 먼저 나왔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이 많은 고추를 언제 다 딸 수 있을지 하루가 무사히 지나갈지 걱정부터 앞섰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기분 좋게 하자’는 마음으로 일에 나섰다. 얼른 비료포대 하나를 챙겨 고랑 하나를 차지해 앉았다. 양쪽 줄을 번갈아가며 상품성 있는 고추만 골라 꼭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끝에 온 신경을 모았다. 그렇게 한 줄 또 한 줄을 옮겨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고랑이 눈앞에 와 있었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느릿하게 흘러내렸지만, 고추 향기와 흙냄새가 따스한 햇살과 어우러져 나를 감싸는 듯했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뜨겁게 작열했지만 그 따가움마저도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그해 여름, 하늘은 한 점의 잿빛구름도 허락하지 않았고 매미는 무더위 속에서도 쉬지 않고 울어댔다. 고추섶은 타오르는 햇볕을 맞으며 매일 새 열매를 매단 채 한여름을 견뎠다.


저녁이면 우리는 우물가에 모여 백열등 불빛 아래 졸린 눈을 비비며 산더미처럼 쌓인 고추를 조심스레 박스에 담았다. 곧게 뻗은 고추들을 하나씩 가지런히 모으고, 상자 무게가 12kg이 되도록 정성껏 채웠다. 우물가에서는 고추를 골라 담는 손길과 말없는 숨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여름밤을 가득 채웠다.


밤이 깊어갈 무렵, 어김없이 엄마는 옛날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바꿨다. 전라도 해남에서 얼굴도 모르는 아빠에게 시집와 시할아버지와 시부모, 그리고 여섯 명의 시동생들과 함께 척박한 시골살이를 시작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자주 들어서 거의 외울 정도였기에 적절한 추임새만 덧붙이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작업한 고추는 밤새 박스를 열어 두었다가, 다음 날 서울 가락시장으로 보내기 전 테이프로 단단히 봉해 마을 집하장으로 옮겼다. 마을에는 트럭을 가진 아저씨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마을 사람들의 고추를 서울까지 운반했다. 각 집은 자기 고추 박스를 스스로 트럭에 실어야 했기에, 나도 아빠와 함께 수십 박스를 옮겼다. 고된 일이었지만 일의 마무리라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고추를 따지 않는 날에는 주기적으로 풋고추에 약을 치고, 엄마와 함께 들깨밭과 콩밭에서 김을 매며 집 앞뒤 마당에 자란 풀들도 뽑았다. 여름밭 곳곳의 초록 잎사귀들은 내 손이 닿기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반복된 손길 사이로 어느새 여름이 스쳐 지나갔다.




등록금과 한 달 치 생활비를 받아 자취방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집을 떠나기 전, 거울 앞에 선 순간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머나, 나 왜 이렇게 촌스러워? 진짜 촌년이 됐네.“ 뜨거운 태양 아래 무방비로 보낸 두 달이 한꺼번에 후회로 몰려왔다. 아... 제대로 망한 거였다!


평소에도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어서 농사일을 하는 동안 아예 잊고 지냈다. 모자도 선크림도 없이 맨얼굴로 밭을 누빈 터라 얼굴과 목, 팔과 다리가 새까맣게 그을려졌다. 덜 더울까 싶어 반팔과 반바지를 입었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그 모든 것은 성실함의 훈장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개강 첫날 학교에 갔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어쩜 그렇게 촌스러운 애가 돼서 나타났냐”

놀림 섞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그다음 해부터는 여름방학마다 햇볕을 막아줄 소품들을 단단히 챙겼다. 수건과 모자, 선크림으로 얼굴을 가리고, 긴소매 옷으로 온몸을 감싸며 더 이상 뜨거운 태양 아래 무방비로 고생하지 않았다.


두 달 동안 엄마 아빠와 땀방울을 흘리며 농사일에 매달렸다. 농사꾼의 딸이자 일꾼으로서 내 몫을 다했고, 그 자부심으로 등록금을 감사히 받았다. 여름 햇살 아래 익어가는 들녘처럼 내 안에도 책임감이 차곡차곡 여물어 갔다.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겠다는 다짐은 파란 하늘에 길게 뻗은 하얀 구름처럼 마음속에 선명히 자리잡았다.


그렇게 두 달을 보내고 도시로 돌아온 뒤에도 가끔 부모님이 평생 묵묵히 땅을 일구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감사함과 안쓰러움에 목이 메었다.

친구 한 번 만나지 못하고 일에만 매달렸던 방학이었지만 그 시간들은 내게 빛나는 여름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다.


입학 때는 소를 팔았지만

그 뒤로는 그럴 일이 없었다.

1학기 등록금은 아르바이트로

2학기는 농사일로

나는 소를 지킨 대학생이었다.



그렇게 스무 살 여름이 지나갔다.





1994년 여름, 야속하게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일만 했다.
호미로 김을 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깔끔하신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약통을 메고 나섰다.


아래는 2017년에 농약 치는 모습이다.

아빠가 항암 중이실 때라 약통을 메는 일은 내 전담이었다. 논두렁 풀을 낫으로 대충 깎은 후 그리고 사진처럼 밭고랑에 제초제(풀 죽는 약)를 쳤다.


들깨밭 고랑에 약(제초제) 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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