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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살기 위한 첫 선택

스무 살의 나는...

by ligdow


*나의 목표

1. 재활원이나 장애인복지관 취직

2. 임상 경험 2년 후 비인가 장애인시설에서 자원봉사3. 대학원(특수교육과) 진학 – 장애·비장애 통합 어린이집 운영


대학 입학과 함께 노트 첫 장에 이렇게 적고, 거의 매일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심지어 이런 결심까지 했다.

‘미팅이나 소개팅은 절대 하지 않는다. 졸업하고 목표를 이룬 뒤에 연애를 한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매우 진지했다.





아빠는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장남이자 맏손자로, 7남매의 맏이면서 6남매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엄마 역시 그런 아빠와 함께 당신이 가진 이름들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셨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우리 집은 늘 크고 작은 바람으로 흔들렸다. 그 속에서 자란 막내딸에게 부모님은 더 큰 기대를 걸었고, 내가 택한 길은 그 기대와 달라서 실망 또한 깊으셨다.


부모님은 막내인 내가 교대에 진학하길 바라셨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 어디서든 대우받고 시집도 잘 간다. 너는 착하고 알아서 잘하니까 걱정 안 한다. “

어릴 때부터 이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당신들처럼 고된 삶이 아니라 넉넉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깊은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안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국민학교 때는 교대를, 중고등학교 때는 사범대를 꿈꾸며 역사 선생님이 되려고 했다. 단 한 번도 다른 길을 떠올린 적도, 진로 앞에서 흔들린 적도 없었다.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고2 여름, 문학 시간이었다.

창밖에는 장대비가 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나는 바른 자세로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 내 마음은 온전히 빗소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는 어느 순간, 마치 창을 넘어 내 안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강한 이끌림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불러 세우는 느낌.

그날 이후

나는 그날의 새로운 흐름을 따라가기로 했다.

아니, 따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장애 아동 재활치료를 하는 물리치료사가 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을 때 부모님은 무척 속상해하셨다. 평생을 시골에서 농사일만 하며 살아오신 부모님은 그 일이 어떤 일인지 모르셨다. 아빠는 실망하신 기색이 역력했지만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엄마는 감정을 숨기지 않으셨다.


“어릴 때부터 맨날 학교 선생님 되겠다고 그러더니,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교대든 사범대든 갈 수 있는데 왜 일부러 고생길을 가겠다고 그러는 거야? 돈도 많이 못 버는 일을 왜 하겠다는 건지 엄마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다.

“내가 헛똑똑이를 키웠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부모님 속 한 번 안 썩이고 살아왔잖아요. 공부도 알아서 했고 어릴 때부터 농사일도 거들고 집안일도 도왔잖아요.

저는 그 일이 너무 하고 싶어요. 돈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는 잘 모르지만, 먹고는 살 수 있겠죠.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런 말로 모든 것이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마음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내 뜻대로 원서를 썼고

합격 소식을 부모님께 전했다.


다음 날, 아빠는 등록금을 내주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납부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고, 안절부절못하며 결국 울면서 아빠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눈을 가만히 감고 한숨만 내쉬셨다. 아빠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아빠, 제발요. 나 대학 가고 싶어요. 제발요...”


결국 엄마가 외삼촌께 돈을 꾸어 등록금을 내주셨고, 얼마 후 아빠는 소를 팔아 그 빚을 갚으셨다.

그렇게 나는 ‘소 팔아 대학 간 딸’이 되었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읍내 은행에 다녀온 뒤, 근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부모님께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빠, 엄마, 부모님을 실망시켜서 정말 죄송해요.

등록금 내주신 것도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알아서 잘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고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속상하게 해 드려서 다시 한번 죄송해요.”


한참을 듣고만 계시던 아빠는, “알았다”는 짧은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으셨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엄마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서운함이 뒤섞여 있었다.

“부모 말도 안 듣고, 좋은 직업을 두고 왜... “


열아홉 해를 살아오며 처음으로 부모님께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부모님을 실망시켰다는 죄책감에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나 눈물 속에서도 마음 깊은 곳에는 작은 빛이 켜져 있었다. 부모님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 내가 믿는 길을 향한 단단한 확신이 거기 있었다.





진로 선택으로 부모님을 속상하게 했던 순간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라 나아갔다.

그 길 위에서 보내던 20대의 매 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다.


하루하루가 설렘과 기대 그리고 삶의 의미로 반짝였고, 때로는 지치고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그 모든 시간을 지나며 나는 진짜 나를 만났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나, 정말 날아다녔어.”


이 글은 그때의 나에게 보내는 달콤한 선물이다.

언젠가 기억이 흐릿해져도 이 기록을 꺼내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꼭 전해주고 싶다.

“나답게, 참 잘 살아왔어.”


나는 내가 믿는 길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지금도 내 삶을 지탱하는 빛으로 남아있다.





*메인 사진은 학창 시절 편지 상자에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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