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20대의 마무리는 사랑으로.
"너 혹시 혜정이 아니니?"
"응. 맞아."
"나 000인데, 기억나니?"
"어."
"반갑다. 혜정아, 옛날에 중학교 3학년 크리스마스 때 카드 보냈었는데 너는 왜 답장을 안 했어?"
"내가 답장을 보냈어야 했니?"
"아... 그건 아니지만... "
여고 동창의 결혼식이 있던 잠실 향군회관에서 중학교 동창인 그를 만났다. 검은 피부에 어딘가 촌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그는 친구들과 함께 예식장 뒤편에 서 있었다. 우연히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이 마주쳤고 그는 그대로 나에게 걸어와 말을 건네었던 것이다.
강원도 산골의 우리 중학교는 한 학년에 150명, 세 개 반뿐이었기에 얼굴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서로 말을 섞어본 기억은 거의 없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첫 중간고사에서 그는 전교 1등을 했고, 졸업할 때까지 나는 성적으로 그를 이겨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등하교 때 한 대뿐이었던 완행버스를 같이 탔으니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했다.
예식이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그가 다가와 물었다.
"혜정아, 너 지금 뭐 해? 혹시 직장 다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
"나 장애인복지관에서 소아물리치료라고 재활치료 하는데. 너는?"
"아... 뭔가 너랑 잘 어울린다. 나는 대학원생인데 곧 졸업해. 혹시 명함 있으면 한 장 줄래?"
시큰둥한 표정으로 명함을 건넸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중학교 때 네가 내 첫사랑이었어."
"그랬니? 그때 말을 하지 그랬어."
"지금 남자친구 있어?"
"아니, 없는데."
"설마 네가 없을라고. 진짜 없어?"
별다른 기억이 없는 사이였지만 어색함은 없었다.
그는 대학원 연구실 이야기를 짧게 들려주었고, 나는 동네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교 동창에게 인사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응대했다. 그는 꽤 반가워하는 눈치였지만 내 말투는 대체로 시큰둥했다. 내가 그의 첫사랑이었다는 뜬금없는 말은 조금 놀랍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 이야기라 신경 쓰이진 않았다.
며칠 후 그에게 메일이 왔다.
“너를 처음 봤을 때 그곳의 공기가 달랐다. 봄 향기가 느껴지며…” 공대 출신에 극 T인 지금의 남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아니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본 나름의 러블리한 표현으로 시작하는 장문의 글이었다. 이후 그는 MSN 메신저로 종종 안부를 물어왔는데 동창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이상하게 불편함이 없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일상을 주고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전화로 이어졌고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통화를 했다. 사실 말하는 건 나였다. 그는 연구실에서의 하루가 늘 비슷하고 딱히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고 했다. 나는 매일 치료실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자원봉사 이야기, 복지관에서의 일들과 공부 이야기까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는 그때마다 “음… 아… 그랬구나. 좋았겠네. 힘들었겠네. “ 를 반복하며 경청이란 이런 것이라는 듯 묵묵하게 들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통화 중에 갑자기 그가 말했다.
“혜정아, 우리 사귈래?”
“너랑 나랑? 싫어. 내가 왜? 우리 친구잖아.”
“싫다고? 싫으면 관둬. 어쩔 수 없지. “
너무 뜬금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도 며칠 뒤 다시 자연스럽게 통화를 하게 되었고 한 달쯤 지나 그는 또 물었다.
“혜정아, 우리 사귈래?”
그렇게 세 번이나 같은 고백과 거절이 반복된 후 그와의 연락이 뜸해진 시기가 있었다. 어쩌면 우리 관계는 이대로 끝이려니 싶었다.
그즈음, 내가 치료하던 진행성 근이양증 남학생이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면서 나 또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는 중학생이 되면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자기 몸 상태를 가장 잘 아는 나에게는 힘든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다며 종종 메일을 보내곤 했다. 치료실에 오면 매트에 누워 흐르는 눈물을 몰래 훔치기도 했다. “집에서는 안 우는데… 선생님 보니까 저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나요.” 눈물을 흘리는 것이 멋쩍은지 괜히 툴툴대면서도, 그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려 하는 아이였다.
내가 조금만 더 열심히 더 잘... 치료했어야 했는데… 부족해서 미안했고 아파하는 아이가 안쓰러워 마음이 무거웠다. 소아 물리치료를 하다 보면 치료사로서 할 수 있는 일과 한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의 질병 진행이나 신체적 제한 앞에서는 개입할 수 있는 범위가 한계가 있다. 그럴 때면 아이를 치료했던 사람으로서 느끼는 무력감과 마음의 부담이 함께 찾아온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크고 깊게 그 시기를 보내는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전화를 했던 것 같다. 몇 달 동안 이어졌던 익숙함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2주 동안 통화를 이어가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사귀자고 했을 때 네가 거절했잖아.
그런데 지금 너 많이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데… 너 주변에 친하고 좋은 사람들 많을 텐데 말이야. 2주 가까이 네가 나에게 연락한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어. 좀 헷갈린다. 괜찮으면 생각해 보고 나중에 말해줄래?”
순간 멈칫했다. 맞다. 이미 세 번이나 거절했던 건 나였다. 우리는 친구라고, 동창이라고, 왜 내가 너랑 사귀냐고 말도 안 된다고 심지어 내가 너랑 왜 사귀냐고 미쳤냐고 웃으며 말한 적도 있었다.
”아… 내가 그랬었지. 내가 힘들다고 아무 생각 없이 너를 불편하게 했나 보다. 미안해. 내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말해줄게. 아무튼 그동안은 고마웠어. “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몇 년 동안 친하게 지내던 세 명의 친구들(서로 모르는 사이)이 동시에 나에게 고백을 했다. 여태껏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왜들 이러는지, 셋이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마치 서로 짠 것처럼 뜬금없는 고백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의 고백은 내 귓가를 스치지도 않았고, 그 순간 번쩍이며 내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였다.
“00아, 나 너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우리 사귀자.”
“뭐라고, 진짜야? 우리 이제부터 사귀는 거 맞아?”
그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기뻐하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진짜 사귀는 거 맞냐며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의 마음이 이렇게 순수하고 강하게 내게 향해 있음이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당장 서울로 올라오겠다고 했지만 내가 주말에 내려가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게 말이 되나, 중학교 동창이랑 사귄다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일이 현실이 되다니 믿기지가 않아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나를 첫사랑이라 했었지. 물론 짝사랑이었다지만… 그게 이렇게 이루어지는 건가?
곧 서른을 앞두고 중학교 졸업 이후 우연히 다시 마주친 동창과 연인이 되다니,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는 건가 싶어 신기했다.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기대와 궁금증이 뒤섞여 일주일 내내 마음이 들떠 있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가 원주 터미널에 도착해 하차할 공간을 찾는 동안, 저 멀리 그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정말 아차 싶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던 사람이 실제로 마주하니 새삼 낯설고 이상했다. 통화만 하다 사귀게 된 터라 그제야 이 상황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말 그대로 ‘현타’가 왔다.
그를 만나러 온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경쾌하게 뛰었는데, 막상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설렘은 순식간에 뒤안길로 멀어져 갔다.
나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싶어 멍해졌고 어쩌면 너무 성급하게 마음을 내준 건 아닐까… 하는 후회가 밀려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승객들이 모두 내리고 버스 안에 나 혼자 남았을 때 숨을 고르고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기사님, 혹시 저 안 내리고 다시 서울로 가도 될까요?”
1990년 그가 직접 만들어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다. 카드를 받고 ’ 얘는 나한테 왜 카드를 보냈지? 무슨 남자애가 이렇게 정성을 들여 만들었을까? 범생이라 그런가.‘ 생각했다.
그해 수십 장의 카드를 받았는데 신기하게도 그의 카드만 간직하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어떤 감정이나 의미를 둔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이 또한 운명인 걸까?
사귀게 되고 편지함에서 꺼내 보여주자 그는
“역시 우리 만남은 운명이었어.”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내용이 다소 길어 두 편으로 연재하며 이번 주에 모두 발행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