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선택
*1편의 마지막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기사님, 혹시 저 안 내리고 다시 서울로 가도 될까요?“
마지막으로 남은 승객인 나는 좌석에 붙들린 사람처럼 그대로 있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렸고, 저 멀리 서 있는 그는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을 살피며 나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되돌아갈 길을 찾고 있으니... 발끝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아가씨, 이 버스는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 다른 데로 가니까 내려야 해요.”
“저… 잠깐만 버스 안에 있어도 될까요? 제가 급하게 생각을 좀 정리할 게 있어서요. “
내부 청소를 해야 한다는 기사님의 말에 마음을 비우고 터덜터덜 버스에서 내려 그에게로 걸어갔다. 내 속을 알 리 없는 그는 만난 순간부터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동안 내내 시선을 내게 고정했다. 순한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얼굴로.
친구 결혼식 날의 우연한 첫 만남, 강남역에서 중학교 동창들과의 모임에서 두 번째 만남 그리고 이날, 세 번째 만남이 우리가 사귄 후 첫 만남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후 늘 바쁜 나의 일상 속에서 그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가능하면 만나지 않으려고 핑계를 대기도 했고, 한 번은 감기약을 사 들고 서울까지 온 그를 비 오는 겨울 저녁, 길가에서 약만 받고 바로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왜 그러냐고 따지거나 서운함을 말하지도 표정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랬구나. 바빴구나. 그럴 수 있지. 알겠어. 시간 나면 괜찮아지면 연락해.” 그런 말뿐이었다.
여름휴가 때 내가 치료하던 나연이를 시골집에 데려다주겠다며 왕복 운전을 자처한 그의 수고와 마음은 고마웠지만, 그마저도 나는 어쩌면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한다면 이 친구와 하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재미도 없고 말도 없고 감정 표현도 안 하는 답답함이 때로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이상하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편함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나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연인이었어도 우리 사이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러니 특별한 이벤트도 신경 쓸 만한 문제도 없이 그저 무던하게 이어지는 관계였다. 여름휴가(8월 초, 나연이를 데리고 시골에 다녀왔던 그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골의 양가 부모님께서 긴급 회동을 가지셨다는 연락이 왔다.
고개를 두세 개 넘어야 만날 수 있는 거리였지만 평생 농사를 지으며 한 자리에서 살아온 분들이라 서로의 존재는 이미 알고 계셨다. 읍내에 오가는 완행버스에서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나누신다고 했다. 자고로 시골 소문이란 게 옆집에서 기침만 해도 다음 날 고개 너머 마을까지 퍼질 만큼 빠른 법. 양가 어른들은 ‘누구네 부모는 어떻고, 자식은 어떻더라’라는 당신들만의 정보와 판단을 이미 충분히 신뢰하신 모양이었다. 그러니 완행버스 안에서 무엇 하나 깊이 캐묻지도 않은 채 상견례 날짜를 먼저 정하신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쪽 어르신들이 먼저 얘기를 꺼내셨어. 결혼을 남자 쪽에서 서두르는 건 좋은 거야.”
엄마는 통화 내내 매우 흡족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00이가 너보다 가방끈이 더 길잖아. 그것도 마음에 들더라. 엄마는~“
둘 다 서른을 넘기기 전에 결혼하라는 어른들의 서두름이 우리 관계에 작은 불씨가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결혼과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고,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마음속 어딘가에 믿음과 신뢰가 있었다. 그 위에서 조용하지만 따뜻한 사랑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함께 그리는 미래의 그림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고 오래전부터 그려온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9월 초 상견례를 하고, 10월 말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결혼식 전날, 내가 울면서 말했다.
“그동안 자기를 속상하게 한 거 다 미안해. 안 만나주고, 핑계 대고… 다 미안해. 이제부터는 내가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 정말이야. 내가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기대해.”
그렇다. 나는 22년째 그를 황제로 극진히 모시고 있고, 그는 매일 내 사랑을 양분 삼아 살아가고 있다.
매일 아침 그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뽀뽀로 잠을 깨운다..
“나랑 결혼해서 행복하지?”
정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확인은 늘 필요하다. 내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노총각이었을 거라는 덧붙임도 함께.
신혼여행 가는 비행기에서 물었다.
“근데, 자기는 내가 속 썩일 때 어떻게 견뎠어? 사귀기 전에 통화할 때처럼, 싫으면 관두라고 했어도 됐잖아.”
“우리가 친구 결혼식장에서 처음 만나고, 몇 달 뒤에 중학교 친구들이랑 강남역에서 만났던 거 기억나지? 그때 횡단보도에서 걸어오는 자기를 만나러 굳이 걸어가서 먼저 악수하자고 했고 내가 손을 한참 안 놨잖아. 그때 결심했거든. 자기랑 꼭 결혼하겠다고!“
“그리고 그때 나 공부도 했어.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자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책을 읽으면서 아, 지금 혜정이는 이런 상황이구나, 이런 감정이구나 분석하면서 자기를 이해하려고 했지. 그래서 사실은 나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려면 이 정도의 노력은 해야지. 전략적으로!
무엇보다도 결국은 이렇게 결혼할 거라고 믿었고! “
어째 조금 의기양양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연애 전략과 전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을 생각하면 솔직히 천만다행이었다. 그가 보여준 세심한 노력과 배려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게 딱 맞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나답게 빛나던 20대의 마지막은 이렇게 사랑으로 마무리되었다. 내 인생 최고의 선택으로 나는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는 나의 남편이 되었다.
그 선택 덕분에 나는 오늘도 미소를 짓는다.
‘나답게 빛나던 20대’를 사랑해 주신 구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