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서 I 05 (완)

연재 소설

by 오 지영

어린 민우의 꿈을 꾼 뒤로, 나는 자주 민우 꿈을 꿨다. 어째서 인지 꿈속의 민우는 계속 작았고,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내게 알리는 것처럼. 그늘져 있지 않은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 모습에 안도하고, 행복하고, 또 슬펐다. 그렇게 꿈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자 며칠 전에는 드디어 큰 민우가 찾아왔다.


민우는 걷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길 위를. 나는 뒤에서 민우의 이름을 불렀다.


“민우야.”


몇 번을 불렀을까. 민우는 내 부름에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표정이란 것이 원래 없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다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다리가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민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마치 제자리걸음을 걷는 사람처럼. 쫓아가면 민우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 역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누가 본드로 신발을 바닥에 붙여놓은 것처럼 옴짝달싹 못한 채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자리에서 민우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어두운 길 위에서 나는 밤새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민우야, 민우야, 하고 이름을 불렀다.



그 꿈을 꾼 지 며칠이 지났다. 여느 때처럼 숙소 예약을 확인하다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예약자 : 박민우


예약자가 오는 날이 되자, 우연히 아들과 같은 이름을 한 사람을 남편과 나는 하루 종일 기다렸다. 이제 겨울이 지났음에도 눈발이 흩날리던 날이었다. 전날 묵던 부부가 떠나자마자 우리는 별채를 열심히 쓸고 닦았다. 평소보다 분주했음에도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로등도 적고 저녁 7시만 되어도 마을 전체가 미리 밤을 맞는 동네였기에 남편은 계속해서 집 앞을 서성였고, 나 역시 부엌 창문에 서서 밖을 자주 쳐다봤다. 차 소리가 나기라도 하면 재빨리 마루까지 뛰어나왔다.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박민우라는 사람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8시가 다돼서야 나타난 손님은 검은색 모자에 단출한 배낭 하나를 등에 지고 어둠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왔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걸음걸이. 민우였다.


민우는 집 앞에 나와있는 우리를 발견하고도 뛰어오거나 빠르게 걷지 않고 보통의 보폭으로 걸었다. 나는 민우가 우리에게 오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서도 그 시간이 무척 초조하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달아날 것 같았기에.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간격이 좁혀지자 나는 민우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왜 이제야 왔어. 엄마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나오지 않았다. 남편도 아무 말 없이 아이의 배낭을 벗겨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미리 준비해 놓은 야채와 고기에 육수를 부어서 전골을 끓였다. 낮부터 준비해 놓은 음식이었다. 민우는 아무 말 없이 식탁 앞에 앉아 내가 퍼준 많은 양의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밥 먹는 민우를 참 오랜만에 바라보았다. 어릴 때는 이렇게 밥 먹는 것을 오래 지켜봤었더랬다. 잘 먹는지, 무슨 반찬을 좋아하는지, 젓가락질을 처음 할 때에도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부터는 남편도 나도 바빠 아이의 밥 먹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다. 저녁을 먹었냐고 물어보기는 했지만 아이가 무슨 반찬을 좋아하는지, 아이가 오늘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서른이 다 넘은 아이의 밥 먹는 모습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마음이 저려왔다.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온 것 같았다.


남편은 나의 당부대로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일은 하고 있냐, 어디 사냐, 이젠 괜찮냐 등의 질문 대신 밥을 다 먹은 민우의 손에 말없이 귤 두 개를 쥐어주었다.



“귤이네.”


민우는 귤을 반으로 가르고 껍질을 깐 다음 두입으로 나눠 홀랑 먹었다. 그리고 다음 귤을 집어 들었다.


“조금 시지?”


내가 물었다.


“그래도 귤은 좋아요.”


“다행이네.”


“귤나무에서 딴 거죠?"


“어떻게 알았어?”


“아빠 카톡 프로필. 귤나무가 있더라고요.”



우리는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셋이 나란히 마루에 앉았다.


“미안해.”


마음속에서 몇백 번이고 했던 말이었다. 아이에게 어떻게 전해질지 몰라 계속해서 맴돌고만 있던 말. 나 역시 그 시간들이 어려워 함부로 하지 못했던 말.


민우는 미안하다는 내 말에 다른 답 대신 요즘 글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우연히 썼어요. 누가 알아주길 바래서도 아니고, 누구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우연히요. 그런데 그 우연을 봐주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어떤 글이었는데?”


“모두요. 내 기억 모두.”


나는 아무 말 없이 민우의 말을 들었다.


“이제는 구독 수가 2000이 넘어요. 일부러 제 글을 기다려줘요. 내 글 덕분에 조금 더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해요.”


“웃기죠?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또 그런 글을 보니 살고 싶었어요.”


아이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그 길을 혼자 걸었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주저앉고, 돌아갈까 가끔 뒤를 바라보고, 또 모든 것을 포기할까 생각하며 걸었을 것이다. 바람이 부는 날에도 걸었을 것이고, 비가 오는 날에도 걸었을 것이다. 그렇게 걷다 스스로 모든 것을 돌이켜보고, 일어나고, 이겨내고, 심지어 상처가 된 부모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살고 싶다고.


나는 지난번 꿈에서 꿨던 신호를 생각했다. 살며시 민우의 무릎에 놓여있는 왼쪽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함께 귤나무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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