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03.
[주말에 지호 돌봄 가능? 정호 아버지 입원하셔서 내려가 봐야 함]
[ㅇㅇ 가능]
지호는 내 하나뿐인 조카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갈 7살 난 남자아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또 묻고, 또 묻는 나의 사랑스러운 조카. 정호 아버지는 언니의 시아버지다. 정호는 언니의 남편이고. 언니는 시아버지를 시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늘 정호의 아버지라 부른다. 그럼 우리 엄마는 영주의 어머니. 나는 영주의 동생.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했다. 분명 오늘 저녁에는 다시 더러워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래도 이 나이에 청소 좀 하고 살라는 잔소리를 듣는 건 싫으니까 이불을 털고, 아끼는 러그는 둘둘 말아 옷방에 넣어놓았다. 아침 9시, 현관문 벨소리가 들렸다.
“일찍 왔네.”
“차 막히기 전에 빨리 내려가 봐야 해.”
언니는 지호를 내게 인계하며 냉장고에 몇 가지의 반찬을 넣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 10만 원이 담겨있는 봉투를 놓고는 서둘러 다시 신발을 신었다.
“지호, 이모 말씀 잘 듣고!”
“네."
“엄마 보고!”
“엄마, 안녕히 다녀오세요.”
나가는 엄마를 보지도 않고 책을 보던 지호가 엄마의 느낌표에 현관문에 나와서 배꼽인사를 했다.유치원에서 가르쳐준 대로 최대한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언니가 나가자마자 나는 지호를 안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모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요.”
6살까지는 분명 까르르 웃고, 내 품에 폭 안기곤 했는데 7살이 되더니 이놈 자식이 다 큰 마냥 영혼 없이 웃는다. 그래도 언니 말로는 주말에 이모네 가있을 거라고 했더니 혼자 가방에 가져갈 책도 챙기고, 애착 인형도 하나 넣고는 빨리 자자고 했단다. 이 귀여운 남의 자식.
지호와 마주 앉아 언니가 가져온 반찬을 꺼내놓고 밥을 먹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육아를 경험했기에 이 것이 얼마나 힘든 장면인지 안다. 마주 앉아 밥을 먹기까지 얼마나 많은 엄마의 고통이 있었는지도 안다.
언니는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이 심했다. 원해서 낳은 아이였고, 오래 기다렸던 아이였다. 분명 아이를 사랑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아이가 울어도 언니는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아이를 지켜만 보는 날들이 잦아졌다. 아이를 안아 달래지 않았다.
“그만 울어. 제발.”
우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갓난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언니는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아이가 우는 것만큼 울고, 어느 날은 아이보다 더 울었다. 그 시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아이가 빨리 커야 했다. 100일의 기적을 우리는 모두 기다렸다. 다행히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쯤 돼서야 언니도 나아졌다. 그런 아이와 마주 보고 말이 통하는 대화를 하고 밥을 먹는 것. 이것 역시 기적이었다.
밖에는 또 비가 내렸다. 핸드폰을 들어 날씨를 보니 오후 내내 비 표시가 되어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어쩔 수 없다. 다른 방도가 없다. 나는 지호에게 키즈카페에 갈 것을 권유했고, 지호는 제일 신나는 얼굴로 승낙했다.
키즈카페는 엄마들에게 최고의 장소다. 물론 이모에게도 최고의 장소다. 내가 무언가를 하며 놀아주지 않아도 혼자 놀다 음료수 마시러 오면 입에 빨대를 물려주면 되고, 배고프다 하면 돈가스를 시켜주면 된다. 핸드폰을 하다 잠시 아이가 어디 있는지 살피기만 하면 된다. 키즈카페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돈을 많이 버셨으면 좋겠다. 이미 많이 버셨으리라 생각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들숨에 건강, 날숨에 평안하시길 빈다.
키즈 카페에 앉아 SNS를 구경하고 있는데 집주인 부부에게 전화가 왔다. 지호를 불러 핸드폰을 가리키며 밖에서 전화를 받고 오겠다는 사인을 보내니 지호가 한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인다. 복도로 나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영현 씨, 잘 지내나 해서요."
"안녕하세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면서도 나는 혹시 아들이 돌아온 것이면 어쩌지, 혹시 노부부가 이 집으로 다음 거주지를 정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전세가 언제까지였더라. 이 동네 전세 이제 비싼데, 괜찮은 데가 있으려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아, 잘 지내시죠?"
"우리가 멀리 있어서 서울 온 김에 한번 들려봤네. 집 앞에 수박 한 통 놓고 가요. 더위 조심하고."
나이스를 두 번 곱한 분들이다. 전세 연장 이야기는 한 톨도 없이 안부만 묻고 전화 통화는 끝났다. 세입자에게 수박을 주는 집주인은 흔치 않다.
키즈카페에서 3시간을 신나게 보낸 지호는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이 나이 때 아이는 신기하다. 지난 동기 모임에서 40대를 코앞에 둔 우리는 우리를 5년 정도 사용한 핸드폰에 비유했다. 배터리를 완충해서 집을 나서도 출근길에 50%가 사라지는 오래된 핸드폰. 업데이트도 잘 안되고, 느린 핸드폰. 하지만 7살 아이는 미래의 핸드폰 같다. 분명 50%로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잠시 꾸벅꾸벅 졸았을 뿐인데 내릴 때쯤엔 완충이 되어있다. 이모는 이제 20%인데.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니 완충된 지호가 내게 물었다.
“이모, 나 아이스크림 사도 돼요?”
“그럼 되고말고.”
잠시 비가 그친 틈을 타 우리는 각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걸었다. 지호가 보도블록의 흰색 부분만 밟으며 발을 보고 걷는다. 누구 조카 아니랄까 봐.
“지호야, 위험해. 앞에 봐.”
“네.”
“대답만 하지 말고 진짜 앞에 봐."
“어, 달팽이다.”
지호가 발걸음을 멈추고 쭈그려 앉았다.
“어머, 이게 뭐야. 얘는 집이 없네? 집을 잃어버렸나 봐.”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고, 국문과를 졸업한 04학번은 최대한 유치원 선생님 같은 말투로 조카에게 '눈만 달린, 마치 지렁이 같은 달팽이'를 '집을 잃어버린 달팽이'로 설명했다. 그러자 지호가 답했다.
“이모, 이건 민달팽이예요. 민달팽이는 원래 집이 없어요. 깨끗한 곳에서만 살고, 남자 여자도 없고.”
지호는 유치원생이 아니라 마치 생물학 전공 교수처럼 민달팽이에 대해 설명했다. 교수님, 죄송해요. 제가 교수님을 너무 얕봤네요.
“이모는 민달팽이 처음 봤어. 지호는 본 적 있어?”
“네. 유치원에서 봤어요. 집에 데려가도 돼요?”
지호가 나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언니였으면 꺼내지도 않았을 말을 이모니까 기대하며 묻는다.
“그럴까? 우리 얘 데려가서 상추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