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여름
Part1. 여름
<지안>
찬란한 여름, 빛나는 여름, 쏟아지는 여름, 청량한 여름, 뜨거운 여름, 그리고 쓰레기 같은 여름. 지안은 계절을 말할 때 여름부터 말하곤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라 여름, 가을, 겨울, 봄의 순서로 말했다. 여름에 태어난 지안에게 시작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그래서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고, 생명력이 가득한 계절. 초록 잎으로 단장한 나무들 아래 서있으면 선선하게 바람이 부는 초여름을, 비릿한 냄새가 나는 여름밤을 사랑했다. 그런 지안의 여름에 빅 엿을 날린 건 건우였다. 김건우.
수 없이 많은 계절을 함께 보냈다. 정확히는 19번의 계절. 계절이 바뀔 때마다 건우는 그림을 그렸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그 시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그 시기마다 지나가는 계절을 담았다. 다 그린 그림 뒷장에는 딱 네 글자를 썼다. 지안에게. 그 그림은 지안을 웃게 했고, 울게 했고, 쓰라리게 했고, 애틋하게 했고, 가끔은 살게 했다.
그림을 받으면 세 번 읽었다. 받은 자리에서 한번 읽고, 집에 와서 한번 더 읽고, 마지막으로 책상 앞에 붙이기 전 마스킹 테이프를 붙인 채로 한번 더 읽었다. 겨울에서 봄이 되었고, 봄에서 여름이 되었다. 그래서 물은 것이다. 이미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는데 손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기에.
“왜 요즘 그림 안 그려?”
“바쁘잖아. 나 요즘 정신없었어.”
“그래도.”
“그려주려고 했어, 여행 갈 때.”
그려 주려고 했다고? 건우의 대답에 기분이 이상했다. 궁금해서 물어본 것은 맞지만 그림을 그려달라 조른 것은 아니었다. 내가 원해서 그리던 것이 아니잖아, 네가 좋아해서 하던 행동이지.
“이거 언제 샀지? 전에 샀었나?”
건우가 LP들 사이에서 새로 산 LP를 찾아들고 물었다.
“저번에 동묘에서 못 산 게 생각나서 인터넷으로 주문했어. 상태 괜찮은 게 있더라.”
“말을 하지, 내가 사주고 싶었는데.”
이상하던 기분은 금세 사라졌다. 지안은 건우의 이런 점을 좋아했다. 말투에서 묻어 나오는 다정함. 그 많은 LP 속에서 새로운 LP를 찾아내는 다정함. 지안의 모든 것에, 지안이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이 있다는 그런 다정함.
“사랑은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해주는 거예요.”
건우를 만나기 전, 지안은 혼자서 뭐든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퍽 좋아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카페에 가 커피를 마셨다. 그런 세상에 멋대로 발을 들인 것은 건우였다. 처음에는 불쑥 침범한 건우가 싫어 열심히 도망 다녔다. 누구세요, 나가세요, 들어오지 마세요, 여기는 제 공간이에요, 하며. 몇 번을 밀어냈지만 늘 건우는 그 자리에 있었다. 더 이상 안 갈게요, 대신 여기 있을게요, 필요할 때 불러줘요, 하며.
건우는 꼭 지안의 손에서 생수를 빼앗아 뚜껑을 열고 다시 지안의 손에 들려주었다. 지안은 그럴 때마다 퉁명스럽게 “나도 손 있어.”라고 하며 손을 보여주었다. 남자가 여자 핸드백을 들고 있는 것만큼 별로라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건우는 웃으며 “알지, 너도 손 있는 거. 그냥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사랑은 원래 그런 거야.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해주는 거.” 라 답했다. 그렇게 19번의 계절이 지났다.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면 지안이 건우의 손에 건네주었다. 그렇게 건우는 지안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혼자서 하는 모든 것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혼자가 된다면 외로울 것 같았다.
경쟁 PT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 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소리다. 우리는 다른 회사를 다니지만 같은 업계에서 일했고, 그래서 서로의 바쁨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퇴근 후 집 에와 간단히 먹을 저녁을 차리고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건우에게 낮에 보낸 메시지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안은 또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밥 먹어. 퇴근 늦어? 저녁 챙겨 먹고 해.]
나는 잘 있음을 보고하는 내용과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서로 바쁠 때면 1이 사라지지 않아도 이렇게 메시지를 남기곤 했다. 잘 잤어?, 출근 잘해, 밥 맛있게 먹어, 나 퇴근했어, 잘 자. 생사 여부를 묻는 정도의 간단한 메시지였다. 가끔 잠이 들 때까지도 연락이 없으면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운한 감정에서 끝났다. 불안하지는 않았다. 서른이 넘었고, 5년을 만났다. 연락 횟수로 싸움을 만드는 일은 애 저녁에 끝났다. 5년이란 시간 동안 사랑도 커졌지만 더 커진 것이 있다면 의리였다. 우리의 의리는 견고하고 단단했다.
건우의 연락이 잘 되지 않고, 매일 피곤하다는 말이 반복되었다. 그 행동에 대해 말을 꺼낸 것은 지안이었다. 너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했을 때, 건우는 인정했다. 지안이 그런 말을 내뱉으면 늘 그랬듯 건우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명을 하거나, 변하지 않았다고 변명을 할 줄 알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서른을 넘기고 하는 연애도, 19번의 계절을 함께 보낸 연애도 이렇게 쉽게 끝이 났다. 누가 왜 헤어졌냐 물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할 만큼.
건우의 새 연애를 확인한 것은 헤어진 지 며칠 되지 않은 날이었다. 노트북에 건우의 아이디 자동 로그인이 되어있었고, 드라이브 사진 보관함 알림이와 눌렀는데 건우와 건우의 회사 과장이 손을 잡고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손이 떨렸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미친놈’
바쁘다 했다. 일이 많아 피곤하다 했다. 모든 것들이 신호였음에도 그저 같이 지내온 시간에 기대어 모든 신호를 무시했다. 지안과 헤어지자마자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건우를 보며 지안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리고 로그아웃을 눌렀다.
처음 하는 연애가 아니었다. 손가락을 몇 개 접을 정도의 연애를 했다. 서른이 되고 나서 건우를 만났다. 그 나이가 뭔지, 전과는 조금 달랐다. 우리는 다가오는 미래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결혼을 꼭 하고 싶다거나, 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한다면 이 사람이겠지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 나는 또 뒤통수를 맞았다. 머리가 얼얼했다.
30대의 이별이 20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애가 끝났다고 해서 울고, 술 먹고, 욕하고, 또 우는 일을 하루 종일 할 수 없었다. 30대는 그래서는 안 되는 나이였다. 이별이 아무리 슬퍼도 술은 다음날 지각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먹고, 출근해 웃으며 동료들과 인사를 하고,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고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처리하고 퇴근해야 했다. 밥을 거르면 체력도 없어지고, 체력이 없어지면 내 일상이 무너지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나이. 그래서 먹고 싶지 않아도 무언가를 끼니때마다 먹어야 했다. 지안도 그랬다.
지안은 건우와 헤어진 뒤 ‘누구의 잘못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상대방의 마음이 돌아선 것도 나의 잘못, 지치고 있음을 돌보지 않은 것도 나의 잘못, 긴 연애를 하고 결혼에 골인하지 못한 것 역시 자신의 잘못 같았다. 정말로 나의 잘못일까? 지안은 매일 생각했다. 그러다 건우의 사진을 봤다. 잘못이 있다면 딱 하나였다. 사랑에 대해 자만한 것.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에 확신한 것. 무엇이든 변할 수 있는 세상이고, 영원한 것은 없는데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던 것. 과거의 내게 돌아가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정신 차리고 앞을 봐, 네게 벌어질 일들을 정신 차리고 지켜봐, 하고 싶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던 주말, 지안은 나갈 채비를 했다. 어디든 나가서 걷고, 어떻게든 먹고, 바람을 쐬어야 한다 생각했다.
“나는 원래 혼자서 잘했어.”
현관문 거울 앞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한 달 사이에 많이도 늙어있었다. 그래서 일종의 주문처럼 말했다. 할 수 있어. 일단은 밖으로 나왔는데 평소에 가던 음식점도 주말이 되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지안은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지안이 가던 모든 곳이 건우와의 추억이었다. 그러니 낯선 곳을 가야 했다. 고속도로를 계속 달렸다. 달리다 보니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양양까지 달렸다. 휴가철이어서 인지 바다 주변에는 서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지안은 차를 잠시 세워두고 멀찍이서 바다를 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차에 타 길 찾기 앱을 켜 근처 카페를 검색했다. réconfort. 조금 떨어진 곳에 핸드드립 전문 카페가 보였다. 목적지로 설정을 누르고 액셀을 밟았다.
카운터 앞에 기역자로 된 바형 테이블이 하나, 소파 하나, 원형 테이블 4개 정도로 되어있는 카페였다.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은 곳. 주문하려고 카운터 앞에 서 있으니 사장인 듯한 여자가 지안에게 말했다.
“저희는 원두가 여러 가지예요. 천천히 보시고 주문해주세요.”
‘예쁘네.’
같은 여자인데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속눈썹에 하얀 피부. 천천히 보라는 말에 정말로 왼쪽 위부터 오른쪽 맨 아래까지의 메뉴를 모두 정독했다. 원래도 메뉴판 보는 것을 좋아했다. 메뉴를 시키고도 건우는 “메뉴판 더 구경해도 될까요?”하며 서버가 가지고 가는 메뉴판을 다시 뺏어 지안의 앞에 놓아주곤 했다. 그럼 지안은 쑥스럽게 “나는 메뉴판 보는 게 좋더라.” 하며 웃었다. “그냥 이곳의 시그니처는 무엇인지, 어떤 메뉴들이 있는지, 다음에 와서는 뭐 먹어야지 구경하는 게 좋아.” 건우는 지안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건우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낯선 곳에 와서 낯선 카페까지 왔는데 또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이 원두로 핸드드립 될까요?”
이왕이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정성스레 내려준 커피. 예쁜 사장이 예쁘게 웃었다. 그럼요, 하면서.
커피를 테이블 위에 두고 창가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주말은 늘 건우와 함께 보내 이렇게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가끔 주말에 카페에 가고는 했지만 주로 밀린 일을 하려고 노트북과 씨름을 하거나, 건우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느라 창 밖을 보지는 못했다. 올해 들어서는 바빠 늘 집에서 봤기 때문에 카페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창 밖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날씨는 화창하고, 사람들 옷차림은 가벼웠다. 지안이 좋아하는 여름이 가고 있었다. 찬란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사장이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저희가 새로운 스콘을 구웠는데 혹시 하나 드려도 될까요? 아직 정식 출시된 게 아니어서 서비스 차원으로요.”
“감사하죠.”
지안의 대답에 사장이 밝게 웃으며 돌아가 스콘 하나와 잼을 담아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부담 없이 드셔주세요.”
괜히 말을 더 걸지 않아 좋다고 느꼈다. 불쑥 스콘을 내밀며 먹으라 하지 않아서 좋았다. 아무리 서비스여도 나의 선택에 맡긴다는 친절함. 남에게 본인의 친절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지키는 정도의 친절,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에게 저 정도의 친절이 제일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안은 스콘을 입으로 가져갔다.
카페에서 나오는 길 문에 붙은 [베이킹 원데이 클래스] 포스터에 지안은 발걸음을 멈췄다. 혼자 산지 몇 년이 되었지만 요리는 잘하지 않았다. 반찬은 주로 사다 먹고, 보통은 바빠 편의점 음식 또는 레토르트 음식을 애용했다. 다양한 레토르트 음식들을 낳아주신 대기업에게 감사하며. 그런데 그 순간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하고 싶었다. 저 포스터에 쓰여있는 베이킹 원데이 클래스를.
“이거 지금도 등록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