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가을
part2. 가을
<새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 했다.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새봄의 시간은 어쩐지 전혀 가지 않았다. 여름이 되어도 봄이었고, 가을이 되어도 봄이었다.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던 준우가 없으니 실수가 늘었다. 이렇게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었나, 나는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거지, 내가 이렇게 어린애 같으니 준우가 떠난 거구나. 하며 자책하는 시간만 늘어갔다. 그렇게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던 중에 일도 늘었다. 사실 꽃꽂이 같은 건 가르칠 생각이 없었는데 언니들이 한번 클래스를 열어달라고 해서 다 같이 꽃꽂이를 했다. 지나가던 동네 분들이 보고 본인도 하고 싶다 하여 한 두 번 더 연 것이 정기 클래스가 되었고 이제는 1:1 클래스도 예약받게 되었다. 자꾸 실수를 하는 마당에 일이 늘어 매일이 벅찬 새봄이었다. 클래스까지 모두 마치고 정리하고 나니 저녁 8시가 훌쩍 넘었다. 퇴근하려던 참에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희나언니]
“언니!”
“가게 문 닫고 있어?”
“응, 이제 가려고요.”
“응, 빨리 나와.”
“네?”
가게 앞에서 한쪽 손에는 담배를 들고 한쪽 손에는 핸드폰을 든 희나가 보였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가니 희나가 마치 어린아이에게 오지 말라 하듯 손사래 쳤다. 마지막 한 모금을 피우고 서둘러 담배를 껐다.
“그래서 오늘은 어땠어?”
희나의 첫인상은 차가웠다. 쿠킹클래스에서 처음 보자마자 예쁘다, 라는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와 그 클래스에 있던 사람들이 다 웃었다. 희나만 웃지 않았다. 세련된 얼굴에 세련된 말투,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몇 번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새봄은 알았다. 희나는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감정에 서툰 사람이라는 것을. 희나가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나 행동이 새봄에게 닿으면 따듯해지곤 했다. 마치 오늘 희나가 새봄을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주말 아닌데 언니 어쩐 일로 왔어요?”
“그냥 답답해서. 내일 쉬는 날이기도 하고.”
희나와 새봄은 굳이 따지자면 정 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서로를 신기해했고, 새봄은 자신과 달리 어른스러운 희나가 좋았다. 희나는 그런 새봄을 귀찮게 생각지 않았다. 해안도로를 달리다 양양 해수욕장 주차장에 주차했다. 밤바다를 바라보며 나란히 모래 위에 앉았다.
“언니는 이제 괜찮아요?”
“글쎄.”
새봄은 그 짧은 말속에서 왠지 모를 희나의 커다란 무게를 느꼈다.
"40이든, 50이든 흔들리는 건 같지 않을까. 나이 먹을수록 요동치지 않으려 애써 몸부림치는 나만 있는 거야."
“저는 너무 쉽게 요동쳐요."
"다들 요동치고 떨고 있는데 밖에선 그게 안 보이는 거 아닐까. 웃을 때 웃고, 울 때 울고, 사랑할 때 사랑하다 보면 닻이 하나하나 생기겠지. 그럼 파도가 쳐도 덜 흔들리고 덜 슬픈 날이 오지 않을까. 억지로 웃거나 억지로 울지 않으면 돼."
희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돼."
30대에는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새봄이 생각하는 어른은 본인의 일을 아무 도움 없이 충실히 해내는 사람,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깨달았다. 새봄이 생각하는 어른은 영영 될 수 없다는 것을. 희나의 말에 파도를 견디는 사람을 상상했다. 닻이 생기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쩐지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양양의 여름은 다른 계절에 비해 활기차다. 늦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서핑을 하기 위해 한달살이를 하는 사람들로 숙소가 가득 차고, 여행자들로 닭강정 가게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시에서는 이러한 여행자들과 주민들을 위해 매달 일주일씩 열리는 플리마켓을 준비 중이었다. 젊은 사장님들이 주축이 되어 첫 플리마켓을 준비하게 되어 새봄과 소윤 역시 참가하기로 했다. 일주일을 모두 참가하는 새봄이 준비위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준비 첫날에는 참가하는 사장님들과 명함을 서로 교환하고 플리마켓에 출품할 물건들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업장이 참여했고,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새봄의 꽃집인 플라타너스는 선물용 허브 화분과 작은 꽃 묶음을 판매하기로 했고 구매 시 식물 입원 쿠폰을 주기로 했다. 새봄의 꽃집에 가끔 화분을 들고 살려달라며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만든 쿠폰이었다. 다시 양지에서 햇볕을 쬐고, 알맞게 수분을 머금게 하고, 다시 살아나, 하면 다시 살아나곤 했다. 생명을 불어넣는 일, 새봄이 제일 잘하는 일이며 제일 좋아하는 일이었다.
플리마켓 당일이 되었다. 시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렸다. 플라타너스 부스는 주차장과 가장 가까이 위치해있었다. 하지만 새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를 하는 것이 내내 새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손님에게 꽃 설명을 하면서도 스티커 없는 차로 그 칸이 채워질 때마다 새봄은 해당 차를 노려보았다. 스포츠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 공간에 또 주차를 했다. 그리고, 새봄은 드디어 터져 버렸다.
<유준>
처음 유준이 새봄을 본 것은 여름이었다. 선배의 공방에서 열심히 도기 굽는 것을 돕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손님들이 찾아와 대신 커피를 사러 들렸다 카페에서 처음 새봄을 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6잔이요.”
주문을 하며 유준의 시선은 새봄을 향했다.
“유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소윤을 쳐다보니 카드를 기다리고 있는 소윤의 손이 보였고, 재빨리 꺼내 소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멀찍이 서서 커피를 기다리는 내내 몰래 새봄을 계속 훔쳐봤다. 테이블 앞에 엎드려 있다 이리저리 뒤척이더니 소윤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는 해맑게 웃는 모습이 예뻤다. 그 모습이 계속 생각나 주말에 몇 번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기다려보곤 했다. 괜히 소윤에게 일 없냐는 소리만 들었다. 혹시나 또 볼 수 있을까 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 같이 가야죠. 형.”
“먼저 가있어. 수 공방에서 왔다고 꼭 말하고! 아, 도기 샘플 가져가.”
플리마켓에 내보일 도기 샘플을 챙겨서 양양문화센터 강당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업장이 참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보았다. 새봄을. 형식상 주고받은 명함 중 새봄의 명함만 빛이 났다.
“한새봄. 이름이 새봄이구나. 이름도 예쁘네.”
그 뒤로 출퇴근길 그 골목을 지날 때면 괜히 목을 빼 플라타너스 안을 쳐다보곤 했다. 모든 사업장이 모이는 날이면 새봄을 마주칠 수 있었는데 가볍게 목례만 할 뿐 준비기간 내내 한 번도 말을 섞어보진 못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섣불리 다가섰다 망치고 싶지 않았다.
플리마켓의 첫날, 공방 원데이 클래스 쿠폰을 두고 와 다시 공방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주차장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려 발걸음을 멈췄다.
“차 빼세요.”
“아 잠깐이면 된다고요.”
“잠깐이고 뭐고, 안된다고요. 스티커 없잖아요. 빼세요.”
모여든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내미니 새봄이 보였다. 새봄은 앞치마를 두른 채로 본인보다 덩치가 2배나 되는 남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장애인 주차 공간이었다. 새봄이 맞는 말만 하는 게 더 화가 났는지, 모여드는 시선이 더 느껴졌는지 남자의 목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뒤에서 보고 있던 유준이 앞으로 나가 끼어드려는 찰나 옆에 있던 소윤이 유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기다려봐. 나는 쟤를 오랫동안 봐왔거든.”
소윤에게 잡힌 채로 멀찍이 서서 새봄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언성을 점점 더 높였다. 새봄은 그 기세에도 전혀 눌리지 않고 조근조근 남자의 잘못을 계속해 일러 주었다. 몇 마디를 더 주고받더니 결국 남자가 재빨리 차를 빼 이곳을 벗어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새봄은 도망가버리는 스포츠카를 잠시 째려보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본인의 부스로 돌아갔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소윤이 유준에게 감당할 수 있겠냐며 장난 섞인 말을 건넸다. 유준은 당황하며 그런 것이 아니라 말했지만 그날, 분명히 유준은 한번 더 새봄에게 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