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가을
Part2. 가을
<지안>
그날 열린 베이킹 원데이 클래스에서 지안과 희나, 새봄은 처음 만났다. 손으로 뭔가를 만지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소윤을 따라 스콘을 만들었다. 처음 해보는 베이킹이었지만, 정말로 소윤 말대로 스트레스가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아이들이 슬라임을 만지는 이유가 이런 것인가 생각하며 열심히 반죽을 치댔다. 클래스가 끝나자 새봄이 희나와 지안을 잡았다. 양양에서 제일 맛있다는 막국수집을 안다며. 지안은 이름밖에 모르는 사람들과 막국수를 먹고 있는 자신이 웃겼다. 몇 년 전 수영장 멤버들과 회식을 할 때가 생각났다. 나이가 들면서 낯가림이 어느 정도는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바다에 노을이 불그스름 깔릴 때쯤이 돼서야 우리는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윤과 민이까지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신기하죠?”
“그러게요.”
“소윤 언니 옆에 있으면 이렇게 신기한 일이 생겨요. 언니는 늘 주위를 돌봐요.”
본지 이틀 된 사람을 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새봄의 말이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소윤은 포근한 사람이었다. 담요처럼 부드럽고 따뜻했고 넓었다. 우리는 올해 모두 이별을 했다. 혼자가 된 시간은 조금씩 달랐지만 우연 치고는 무척 신기한 만남이었다. 서울에 돌아온 뒤로도 말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베이킹 클래스 핑계로 양양에 몇 번을 더 갔다. 회사 사람들은 “베이킹하러 양양에 간다고?”, “그게 말이야 뭐야”, “베이킹 클래스 너네 집 앞에도 있어.”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양양에 베이킹을 하러 간다고 말하는 자신이 조금 멋져 보였다. 그래서 지안은 주말에 뭐해, 라는 대답에 자주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약해진 마음을 알아서인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짧은 시간에 비해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양양에서 지안은 대부분 웃었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건우의 흔적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안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집 여기저기에서 건우의 말이나, 건우의 물건이 툭툭 튀어나왔고 그럴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어느 날은 퇴근하고 돌아오니 집 앞에 택배박스가 여러 개 쌓여있었다. 건우의 차와 집에 있던 지안의 물건들이었다. 택배 4 상자. 그 짐들을 하나하나 풀면서 슬펐다가, 기가 찼다가, 화가 났다가, 또 슬펐다. 물건들 중 LP만 빼고 모두 다시 박스에 넣었다. LP도 버리려다 LP가 무슨 잘못이 있나 싶어 버리지 않았다.
이사를 할 때도 이사 견적을 내고, 짐을 빼고, 가스도 끊어야 하고, 통신도 불러야 하고, 새로 가구를 들이고, 입주 청소를 한다. 해야 하는 일이 이렇게나 많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지안은 연애가 끝날 때마다 시간을 들여 정리했다. 상대와의 추억을 되새기기도, 떠올리기도 하며 충분히 보고 싶어 하고 충분히 생각했다. 그래서 헤어짐은 늘 길었고, 이 과정이 다 끝나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이제 정말로 안녕. 하지만 건우의 사진은 지안에게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집이 통째로 폭파된 느낌이었다. 추억할 사진, 추억할 시간, 추억할 무엇도 남기지 않은 채 날려 보내야 했다.
집에 혼자 있는 주말엔 새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있을 건우를 생각하면 열이 올랐다. 사랑했던 사람이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면 불행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인데, 지안이 더 불행해지는 것 같았다. 자다가도 갑자기 화가 나 잠에서 깼다. 그리고 아침이 올 때까지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그런 날이 반복되니 회사에서 조그마한 실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삶에 자꾸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빨간 불이 들어왔다.
“상담 받아보는 거 어때?”
출근해 커피를 사러 가는 길에 동기인 소민이 지안에게 말했다.
“요즘 정신과 다니는 게 무슨 흠도 아니고, 윤선배도 공황으로 약 먹은 지 꽤 됐는데 많이 좋아졌대.”
“그럴까.”
“네 상태가 심각해서 그런 게 아니야. 어쩌면 직장인의 80%는 다 공황장애일지 몰라. 우리 다 정신과를 다녀야 하는데 그냥저냥 살고 있는지도.”
“그래도 남자 때문에 정신과를 가는 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남자 때문에 가는 게 아니지. 그냥 인생에 빨간 불이 들어왔으니 가는 거지. 아파서 병원 가는 거랑 뭐가 달라.”
정신과를 가볍게 대하는 말투 때문이었을까. 좋은 병원을 알아다 준다는 소민을 말리지 않았다. 점심 먹기 전, 소민이 넘겨준 번호를 보며 고민하다 금요일 퇴근 후로 예약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소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희나씨가 승진을 했다 해서 다 같이 모이면 좋을 것 같아서, 지금 단풍이 너무 예쁘거든. 혹시 약속이 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언니 저 그게..”
정신과 예약을 했다는 말을 꼭 남에게 해야 하나. 그냥 병원이라 해도 되고, 아니면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도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안은 소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생각 같아요. 그런데, 우리 가을만 지나고 나서 가보는 게 어때요?”
소윤은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말했다. 정신과에 가보겠다 한 지안의 결정을 좋은 생각 같다고 했다. 그 말에 지안은 예약을 취소하고 소윤의 말대로 가을까지만 버텨보기로 했다.
“영수증은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따듯한 커피를 2잔 테이크 아웃해서 차로 돌아와 희나에게 한잔을 건넸다. 지안이 촬영장에서 생각보다 일찍 끝나 희나 회사 앞으로 희나를 데리러 왔다.
“언니, 여기 커피요. 얼음도 하나 넣었어요.”
희나의 승진 축하를 하기 위해 모이는 날이었다. 부점장에서 점장이 되었다고 했다. 희나는 하는 일도 똑같고 말만 승진이지 별 다를 게 없다고 설명했지만 그 말만 다른 것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지 아냐며 소윤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비가 많이 오네. 운전 괜찮겠어?”
“괜찮아요. 천천히 가면 되죠.”
새봄이 꽃다발을 준비했다. 문을 잠근 카페에서 메인등만 킨 채로 조금 어둡게 저녁을 먹었다. 소윤이 만든 치즈케이크를 가져오자 희나가 콥케 포트와인을 꺼냈다. 투명한 와인잔이 적색 빛으로 물들었다. 희나의 승진을 함께 축하했다. 그렇게 좋은 날로 마무리되는가 했는데 분위기를 깬 건 지안이었다.
“역시 이 자리에 오면 안 됐나 봐요.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자꾸 눈물이.. 아직도 자꾸 화가.., 좋은 날인데 죄송해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떨구는 지안을 소윤이 안았다. 제일 멀리 떨어져 있던 새봄이 다가와 지안의 오른손을 잡았다. 민이가 따뜻한 티를 만들어 바에 내려놓자 희나가 가지고 와 지안의 앞에 두었다.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말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더 울어도 괜찮다고. 울다 보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알지 않냐고, 인생은 그렇게 나를 지치게 만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를 빛으로 따듯하게 비춘다고.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