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가을
part2. 가을
<민>
헤어지고 난 뒤 준이를 세 번 만났다. 처음에는 잘 지내냐는 연락이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이 동네에 올 일이 있다며 같이 저녁을 먹자 했다. 최대한 미련 없어 보이게 일정을 체크해 본다 하고 저녁이면 괜찮을 것 같다 대답했다. 사실 일정이 있어도 취소했을 거면서. 민이는 그날 카페에서 돌아와 다시 샤워를 하고 최근에 산 옷 중 제일 비싼 캐시미어 니트를 입었다. 잘 뿌리지 않던 향수도 뿌렸다. 그래 봤자 옷장에 10벌은 있는 것 같은 베이지색 니트지만, 여전히 별 소득 없이 매일 글만 쓰고 있지만, 준이가 모르는 옷을 입고 준이가 모르는 향수를 뿌렸으니 낯설길 바랬다. 괜히, 그런 마음이 들었다.
조용한 선술집에서 사케와 모듬 꼬치를 시켰다. 준이가 은행 꼬치를 민이 쪽으로 돌려주었다. 민이는 카페에 오는 손님들 이야기를 했고, 준이는 최근에 만난 작가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아닌 모든 것을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 대화를 통해 우리의 근황은 알 수 없었지만,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얼마 마시지 않은 것 같은데 늦은 밤이 되었다. 약간의 취기가 도는 채로 우리는 조금 걸었다. 가을이 왔는지 날씨가 차가웠다. 그리고 추운 날씨 핑계로, 술이 조금 부족하다는 핑계로, 결국 향한 것은 민이의 집이었다.
문을 열자 마틸다가 어딜 다녀왔냐며 잔소리하듯 야옹거렸다.
"내가 누구를 데려왔게?"
술에 취한 민이는 마치 초대 손님을 소개하듯 준이를 몸으로 가리고 있다 짠 하고 마틸다에게 보여주었다. 마틸다는 시끄럽게 야옹 거리며 이리저리 뛰더니 준이에게 머리를 박았다. 두 번 박았다. 마치 부녀 상봉이라도 하듯 서로를 껴안고 뒹굴었다.
민이는 조금 흐트러진 채로 소파에 누웠다. 점점 취기가 올라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준이는 그런 민이를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가와 민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민이 손마디 마디에 입을 맞췄다. 민이가 좋아하는 행동이었다. 마치 새끼 고양이가 되는 기분.
대학 시절 민이의 복장은 늘 회색 후드 티와 짧은 맨 손톱이었다. 하루 종일 타자만 치는데 길고 예쁜 손톱은 민이에게 필요치 않았다. 손톱이 길수록 타자를 칠 때 거슬려 아플 정도로 바짝 깎는 습관이 있었다. 당시 만났던 남자들도, 만나지 않던 남자들도 민이 손을 보고는 너는 네일 같은 거 안 하네,라고 했다. 묘하게 그 말이 기분 나빴다.
준이와는 친하지 않은 과 동기였다. 과실에서 과제를 하고 있는 민이 옆에 와 노트북을 켜며 준이가 말했다.
“손.”
진짜 이것들이 왜 이렇게 손톱 가지고 난리야, 라는 속 마음이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찰나 준이의 속 마음이 더 먼저 나와버렸다.
“손, 예쁘다.”
민이의 속 마음 대신 나온 건 심장이었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밖으로 들릴까 봐 노트북을 닫고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었다. 그 뒤로 준이와 시간을 보내는 내내 한 번도 손톱을 단장한 적은 없다. 준이는 민이의 짧은 손톱 끝을 본인의 손가락 끝으로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나중에 대작을 쓸 귀한 손이라며 설거지도 절대 못하게 했다. 그런 민이의 손을 소중하게 잡은 채 마디마디마다 준이가 입을 맞췄다. 헤어지기 전과 똑 같이.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준이는 다정하게 안았고 민이는 그 다정함이 좋아 준이의 어깨에 얼굴을 파 묻었다.
씻고 나온 준이는 책장을 구경했다. 민이는 그런 준이를 구경했다. 무얼 찾는 듯이 책장의 첫 번째 칸부터 차례대로 책장을 훑었다. 그러더니 구석에 꽂혀있던 책 한 권을 빼어 손에 들었다.
"여기 있다.”
피천득, 인연.
우리가 좋아하는 책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준이가 좋아해서 민이에게 선물했고, 그래서 민이 역시 좋아하게 된 책.
민이는 소설보다 수필이 어려웠다. 소설은 마음대로 상상해서 쓸 수 있었는데, 수필은 현실과 감정을 적절히 섞어 표현해야 했다. 졸업 후 민이가 SF나 판타지 소설에 매달려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대학 시절 노트북 앞에서 수필 과제와 한참 씨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썼다 지웠다 몇 번을 반복하고 있는데 준이가 책 한 권을 노트북 위로 올려놓았다.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수필이라며. 그렇게 처음 읽었다. 과제를 무사히 완성해 낸 후로도 심심할 때면 읽었다. 일이 잘 안 풀려도 읽고, 글이 잘 안 써져도 읽었다. 손이 자주 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여러 번 읽었다. 사랑은 그런 거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거라면 내게도 갑자기 매력도가 상승하는, 그런 거니까. 몇 번이나 읽었을까. 책을 보지 않고도 몇 개의 문장을 외울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대목을 좋아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이 대목을 말할 때면 늘 마지막 문장을 함께 말했다. 둘 중 하나가 세 번째는, 이라고 운을 띄우면 동시에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 아니 만난 것이 뭐 그리 좋은 문장이라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인연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애절한 마음인지 잘 나타내 주는 문장이었기에 우리는 자주 곱씹었다. 준이는 책을 펼쳐 휘리릭 한번 넘겨 보더니, 다시 그 자리에 꽂아 두었다.
문제는 준이가 돌아간 후였다. 준이가 헤어지고 처음으로 민이를 찾아온 날, 사실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근처에 일이 있다는 준이 말은 나를 보고 싶어서 하는 핑계인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돌아간 날 후로 준이에게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준이는 이미 없었고, 집에 도착했다고도 밥을 먹었냐고도 잘 자라는 말조차 없었다. 하루 종일 준이의 연락을 기다리다 새벽이 돼서야 잠에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까, 준이에게서 밥 먹었냐는 연락이 왔다. 화가 났지만 화낼 수 없었다. 여기서 화를 내면 준이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별 후 만남이 세 번째 반복되는 날, 민이는 현관에서 돌아서는 준이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와.”
준이는 민이의 말에 동그란 눈을 했다 이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 표정을 알고 있다. 준이는 지금 슬프다. 민이는 준이를 밀고 문을 닫았다. 잠시 조용하더니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현관문에 등을 기댄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야 헤어진 것 같았다. 헤어지고도 세 달 만에, 계절이 바뀐 이 가을에야 우리는 진짜로 헤어졌다. 우리도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