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4 봄
Part.4 봄
<민>
이번에도 떨어지면 과학 소설은 쓰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떨어졌다. 졸업 후 친구들이 문학상에 당선되는 동안, 적어도 자신의 책을 내는 동안, 출판사의 편집자가 되어 커리어를 쌓는 동안 민이는 계속 제자리였다. 김민의 히스토리를 쓰시오.라는 물음에 공백으로 답을 제출해도 될 만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불안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얼마큼 더 써야 할까.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진작에 포기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들은 머리를 맴돌고 맴돌아 그날 하루를 망쳐버리는 재주가 탁월했다.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갔다. 커피를 한잔 내려 허리를 잠시 기댄 채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같은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3번 찍혀있었다. 남겨져 있는 문자를 확인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비전과 사상입니다. 메일과 전화드렸는데 답이 없으셔서 문자 남기니 연락 부탁드립니다. >
비전과 사상. 들어본 출판사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메일을 읽었다. 과학 문학상에 출품했지만 떨어진 <기억중개센터>를 출판하고 싶다 했다. 당선작도 아닌데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이의 글은 심사위원에게 꽤 좋은 평을 받았고, 그 심사위원 중 하나가 지금의 출판사 대표에게 추천했다고 출판사 직원은 전했다.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책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출판은 편집자가 정해지자 빠르게 진행되었다.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시간들을 거쳐 마지막 페이지인 저자의 말에 넣을 글만 쓰면 정말로 완성이었다. 민이는 뭔가 그럴듯한 말을 쓰고 싶어 썼다 지우고, 또 소소한 말을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 써 내려간 문장의 첫 단락은 이러했다.
<수많은 글자를 썼지만 수 없이 낙방했습니다. 하지만 이 손으로는 꼭 글을 써야 한다던 그 시절 남자 친구 덕에 꾸준히 글을 썼습니다…>
첫 글자인 수부터 마지막 온점을 입력할 때까지 민이는 준이를 생각했다. 글을 수정하는 내내 준이가 보고 싶었다. 왜 헤어지자는 말에 바로 알겠다 한 것인지, 왜 만나고 돌아가서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 왜 가라는 말에 그대로 가 버린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 글이 준이에게 닿기를 바랐다. 책이 출간되고 일주일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정준은 민이 앞에 서있었다. 민이가 좋아하는 꽃을 든 채.
<준>
민이의 글이 책으로 나온 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유명 출판사에서 신인 작가의 책을 낸다더라 하는 소문은 꽤 빠르게 들렸다. 또 꼭 그 루트가 아니어도 동기들의 입방아에 민이는 자주 올랐다.
“신간 목록 보실래요?”
출판사 도서관에 신간들이 들어왔다. 민이의 책도 보였다.
“어..”
“아, 정대리님 동기시죠? 조과장님이 그러시던데.”
“맞아요.”
“책 빼놓을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책을 빼놓겠다는 막내 직원의 제안을 거절하고 퇴근길에 서점을 들렸다. 신간 코너로 가 직접 책을 샀다.
김민, 기억중개센터.
‘결국 완성을 했구나.’
집으로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외투만 벗은 채로 거실 의자에 앉았다. 민이가 재작년 생일 선물로 사준 의자였다. 글자 하나하나 빼놓지 않으려 최대한 조심스레 읽었다. 어린아이를 만지듯 책장을 넘겼다. 늘 민이의 글을 제일 처음으로 읽는 독자였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그런 사실에 마음이 아려왔지만 민이에 대한 대견함이 더 컸다.
‘것 봐, 내가 뭐랬어. 너는 쓸 수 있다고 했잖아.’
준이는 민이의 글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음을 느꼈다. 글자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민이가 고뇌했을 모습이 그려졌다. 같은 의미의 단어를 두고 이게 나은지, 저게 나은지 묻던 민이의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어느 페이지에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며 엎드려 있던 민이의 모습이 보였다. 책을 읽는 것이 이렇게나 아프고 힘들 수가 있나. 마지막 장까지 몇 페이지를 남기지 않았을 때 준이는 책을 덮고 부엌으로 갔다. 어딘가에서 예전에 선물 받았던 와인을 찾았다. 이제는 2개가 아닌 1개가 된, 짝이 없는 쓸쓸한 와인 잔에 따라 혼자 민이의 첫 책 출판을 축하했다. 그리고 책을 들어 다시 읽었다.
<수많은 글자를 썼지만 수 없이 낙방했습니다. 하지만 이 손으로는 꼭 글을 써야 한다던 그 시절 남자 친구 덕에 꾸준히 글을 썼습니다..>
준이였다. 민이가 말하는 그 시절 남자친구.
가야 했다. 와인을 먹은 자신을 원망하며 준이는 날이 밝아지기만을 기다렸다.
민이에게 캔 커피를 쥐어줄 때에도 이렇게 손이 떨렸었다. 손 끝 하나 닿지 않았지만 혼자 덜덜 떨려 캔 커피를 들려줬었다. 아직 민이를 보기도 전인데 손이 떨려왔다. 이렇게 해서 양양엔 어떻게 가냐고. 최대한 민이가 좋아하는 옷차림으로 입었다. 회색 카디건. 머리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 민이는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걸 좋아하니까. 그렇게 양양으로 향했다.
‘저번에 이 근처에 꽃집이 있었는데..’
“어서 오세요.”
“노란 장미 있나요?”
“네, 있어요. 선물하시나요?”
“아, 네.”
“노란 장미를 특정해서 찾으시는 손님은 많이 없는데 들여놓길 잘했네요.”
노란 장미 다발을 들고 민이 집 앞에 서서 전화를 하려 하니 어디서 낯익은 실루엣이 말을 걸었다.
“정준?”
“밥.. 먹었어?”
<다시, 민>
책을 출간한 뒤 많은 사람에게 연락을 받았다. 나, 사실 사랑받고 있었구나 느낄 수 있었던 일주일이었다. 안 친한 동기들에게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너는 될 줄 알았어.라는 말을 들었다. 작년 동기 결혼식에서 날 한심하고 짠하게 본 것을 나는 다 기억하고 있다. 이놈 새키야.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는 출간도 한 지성인이니 고마워라고 답을 했다. 언니들이나 새봄이 모두 기뻐했고, 모두에게 연락이 왔다. 딱 한 사람 빼고.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카디건을 입은 정준이 내가 좋아하는 노란 장미를 들고 지금 내 앞에 서있다. 나는 지금 세수도 안 했고, 슬리퍼를 신었고, 파와 계란이 들어있는 장바구니를 들고 그런 정준 앞에 서있다.
“밥 먹었어?”
저놈의 밥 타령. 그때도 일주일 만에 밥 먹었냐고 묻더니 밥이 대체 뭔데, 밥이. 밥..어.. 밥
(회상)
“저녁 먹었어?”
“뭐야, 너랑 먹었잖아.”
“사랑한다는 말이야.”
순간 떠올랐다. 준이와 했던 대화. 밥 먹었냐고 묻는 건 사랑이라고 말하던 나. 일주일 만에 연락해서는 밥 먹었냐고 묻던 준이. 아, 어쩌면 준이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야.”
나는 아마 기다렸나 보다. 준이가 변명을 할 때까지. 나를 보고 싶었다고 말할 때까지. 날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말하는 준이의 입술이 예뻤다. 예쁜 건 가지는 거다. 우리는 그렇게 노란 장미와 파를 든 채로 입을 맞췄다.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