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소설 I 여름 지나 봄 I 14

Part.4 봄

by 오 지영


Part.4 봄


<희나>


부점장에서 점장이 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글자 하나 차이지만 무게는 달랐다. 부점장일 때는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 됐지만 점장은 모두를 생각해야 했다. 20대인 어린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까지. 달라진 점이 또 있다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희나는 직원들에게 자주 안부를 물었다. 열심히 꼰대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점장은 선택을 해야 하는 자리였다. 어제와 같이 애매한 입주사 할인 재결제 등의 문제가 생길 때면 책임지고 알맞은 선택을 해야 했다. 20대 때는 선택의 갈림길이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번 정도였던 것 같은데 30대가 되고 나서는 매일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었다. 출근하면 선택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고, 출근하지 않는 날에도 선택을 요청하는 직원들의 전화가 오곤 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어제 먹고 남겼던 그릴드 샌드위치 반쪽을 데웠다. 와인도 한잔 따르고 소파가 아닌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앉아있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휴대폰이 반짝였다. 라디오 어플의 팝업창이었다.


“아, 그랬지. 내가 라디오를 들었었지.”


잊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으면 라디오를 들었던 것을. 수호를 만나고 나서 라디오 대신 그 시간엔 수호와 전화를 했다. DJ의 목소리 대신 수호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잠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희나의 말이 느려지기 시작하면 수호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가다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헤어지고 나서는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주로 양양에 갔다. 바다를 보고 싶으면 갔고, 누군가가 필요해도 갔다. 슬리퍼 신고 집 앞 마냥 두 시간 거리를 달려갔다. 라디오를 들었던 것을 전혀 잊고 살았다. 희나는 어플을 눌러 오랜만에 라디오를 들었다.


[다음 사연 소개할게요. 은댕님의 사연입니다.

여자친구는 늘 괜찮다 하는 사람이에요. 이걸 먹자 해도 좋다, 아프냐 해도 괜찮다, 표정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 있냐 물어도 다 괜찮다 하지요. 저는 점점 모르겠어요. 여자 친구의 마음이 어떤지. 무조건 괜찮다 하는 마음도 과연 사랑일까요? 아.. 은댕님.. ]


누굴까. 이런 일이 흔한 일일까. 수호일까. 아니, 수호는 아닐 것이다. 수호는 무척 단호하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했었다. 주는 사랑에 지쳤다 했다. 하지만 꼭 사연이 희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수호에 대한 미안함과, 나 역시 수호의 말에 받았던 상처의 응어리들이 뒤엉켰다. 그날은 밤새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를 들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마주친 것이다. 수호를.


희나의 와인샵은 대형 쇼핑몰에 입점되어있다. 그리고 그곳은 수호의 방송국과 그리 멀지 않았다. 연애를 할 때에는 수호가 희나의 퇴근에 맞춰 데리러 오기도, 점심 먹으러 들렸다 잠시 얼굴만 보고 가기도, 같이 저녁을 먹기도 했다. 희나는 퇴근길이었고, 수호는 야근 때문에 저녁을 사러 온 길이었다. 멀리서도 서로임을 알 수 있었다. 며칠 전 들은 라디오 사연 때문인지 수호의 얼굴이 밉게만 보이진 않았다. 희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호도 아무 말 없이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에게 등을 보인채로 발걸음을 돌렸다. 희나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수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나간 사랑에 미련이 남아서는 아니었다. 우리가 한 사랑에 문을 닫고 왔어야 했는데 문을 닫지 않고 온 것 같았다. 문을 닫고 와야 할 것 같았다.


날이 좋았던 주말 오후, 노트북을 열었다. 보낸 메일함에서 1년 전 보냈던 여행 스케줄 메일을 찾아 수호의 메일 주소를 클릭했다.


받는 사람 : lake.jung@gemail.com


나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 고마움이라 말하던 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믿던 수호에게 그것은 사랑이 맞았다 말했다. 우리가 한 것은 사랑이 맞았다고. 내 서툰 감정 표현으로 상처를 받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대한 내 안에 있는 둥글둥글한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 수호에게 보냈다.


“진심을 다하면 상대방도 진심으로 받을 수밖에 없어.”


언젠가 소윤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진심을 다해 써 내려갔다. 꽤 장문의 메일을 쓰고 나서 한번 읽어보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깜빡 잠에 들었다. 밤도 되지 않았는데, 라디오도 없이, 누군가의 잘 자라는 말도 없이, 술기운도 없이 그렇게 잠에 들었다.



그날 저녁, 수호에게 전화가 왔다. 헤어진 지 반년 하고도 4개월 만이었다. 여전히 저장되어있는 수호라는 이름이 휴대폰 액정에 떠서 반짝였다. 하지만 희나는 받지 않았다. 대신 운동화를 신고 나가 집 앞 공원을 걸었다. 어느새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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