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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나오는... 딸과의 감정 보듬기

'내 것'의 경계

by 성희

:화장대 위, 끝없는 물건들


​화장대 위는 그야말로 **‘만물상(萬物相)’**이다! 립스틱 하나, 파운데이션 하나, 아이섀도 몇 개만으로 충분했던 나와 달리, 딸의 화장대는 끝이 보이질 않는다. 도대체 저 많은 화장품은 무엇에 쓰는 것일까?

​정리를 시작하려는데, 낯익은 물건 하나, 헤어드라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손을 대려는 찰나, 딸이 황급히 끼어든다.

"엄마! 저거 다음에 다른 도시로 한 해 살이 하러 갈 때 가지고 갈 거야!"

"아니, 왜 그래?" 내 물음에 딸의 목소리에 갑자기 서운함이 묻어났다.

"큰 드라이어, 원래 내 거였는데... 엄마 귀촌할 때 가져갔잖아? 그거 지금 남동생 방에 있던데, 엄마가 동생 줬지?"



무심했던 엄마와 서늘했던 과거


​딸이 시험 합격 후 발령이 나지 않아 쿠팡 일용직으로 나갈 때, 우리는 귀촌을 했었다. '드라이어를 왜 가지고 갔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무심코 대답했다. "돌아왔을 때 네 물건이 너무 많아서 동생 줬지."

​윽! 설거지를 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때 하나밖에 없던 딸의 드라이어를... 내가 귀촌할 때 덜컥 가져갔었구나! 그리고 돌아와서는 물어보지도 않고 아들 줘버린 것이다. 딸은 얼마나 서운했을까!

​문득 나도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결혼 후 시댁에서 살 때, 내가 사간 커피포트가 사라졌었다. 여쭈어보니 시어머니께서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시동생에게 주어버리신 것이다. 커피포트가 흔치 않던 시절, 써보지도 못한 채 내 방에 있던 물건을! 그때 가슴이 서늘해지던 서운함이 지금껏 남아있는데... 아! 나도 똑같은 일을 했구나. 이제야 딸의 감정이 깊이 느껴졌다.


​사과, 그리고 되찾은 공감

​설거지를 끝내고 나는 딸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네가 아끼던 물건인데, 엄마가 가져가서 서운했겠구나.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너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동생 줘서 정말 미안해."

​딸은 의외로 담담했다. "괜찮아요. 저에게는 새것이 많은걸요." 오히려 나를 걱정해 준다. "엄마, 지금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아요. 집 뒤의 산이라도 다녀오세요. 엄마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퇴직 후 나는 새 옷을 사지 않았다. 평소에는 등산복 차림이지만, 외출할 때는 스스럼없이 딸의 코트를 입고, 딸의 백팩이나 핸드백을 사용한다. 딸에게 핸드백이 그리도 많건만, 나는 백팩 하나, 핸드백 하나만 고집해 쓴다. 그런데 그것도 서운했던 모양이다. 이제는 반드시 물어보고 사용해야겠다!


아이러니한 '내 것'의 경계

​딸이 외출 준비를 한다. 치마를 찾더니 A라인 니트 치마를 꺼내 입는다.

어? 그런데 저 치마는... 바로 내가 입으려고 샀던 것 아닌가! 그런데 딸이 자기가 달라해서 검은색과 베이지색 두 개를 사주었지.

​아! 이런 아이러니가! 내 물건은 스스럼없이 자기가 사용하면서, 내가 딸의 물건을 사용하면 서운해하는구나! 나는 내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데, 딸은 내가 쓰는 화장품, 옷, 가방까지 아까워하고 있구나!

​화장대 서랍을 정리하자, 헤어드라이어, 고데기, 심지어 다이슨까지... 너무 많은 헤어 손질 기기가 쏟아져 나온다. 딸은 드라이어 대신 다이슨의 한 부품을 쓴다며, 나머지 기기들은 정리해 팬트리(pantry) 속으로 밀어 넣는다.

​결국, 딸과의 '내 물건' 공방전은 물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마음'의 경계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감정을 보듬고, 소유의 경계 너머에 있는 존중을 깨닫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이제 스스럼없이 터져 나오는 과거의 서운했던 감정들을 터뜨리고 나는 들어준다. 아들에 대한 편애를 터트리던 딸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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