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친정 언니와 둘이서 처음 떠나는 길. 형부를 하늘나라로 보낸 언니를 내가 걱정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언니는 나의 팍팍한 삶을 먼저 보듬어주었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고 포근했던 그 여행길은, 우리 서로에게 가장 깊은 위안이 되어주는 애틋하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새벽 5시 40분 출발을 위해 서둘렀건만, 콜택시가 너무 가까이 있어 3분 만에 도착! 약속 장소에 40분이나 먼저 도착해 버렸습니다. 뼈를 때리는 듯 차가운 새벽 공기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지만, 정작 예약한 관광버스는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다. 서늘함이 가시지 않은 채 차에 올랐지만, 다행히 불을 꺼주신 덕분에 저는 서산에 닿을 때까지 고요 속에서 깊은 잠을 청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언니의 곁에서 잠든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서산 간척지. 폐유조선을 이용한 정주영 회장의 '위대한 도전'이 펼쳐진 곳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역사의 뒤에는, 사실 고흥의 김세기 회장이 10년 앞서 개발했던 기술이 숨어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위대한 역사는 종종 한 사람에게만 초점이 맞춰지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이들의 땀과 지혜가 스며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네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보이는 화려함 뒤에 가려진 소중한 노력들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첫 목적지인 간월암에 도착했습니다. 밀물 때는 작은 섬이 되고, 썰물 때는 육지로 가는 길이 열리는 신비로운 곳. 이곳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넘어, 한국 불교의 세 시대를 관통한 세 분의 고승이 깨달음과 염원을 남긴 성스러운 도량이었습니다.
고려말, 무학대사: 번뇌를 잊고 수행하던 중, 밤하늘의 달(月)을 보고 진리를 깨치신 후 '간월암(看月庵, 달을 보는 암자)'이라 이름 지으셨다 합니다.
일제강점기의 만 공 선사: 폐허가 된 암자를 중창하고,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이곳을 비밀스러운 기도 도량으로 삼으셨습니다.
탄허스님은 무학대사의 깨달음과 만 공 선사의 간절한 염원을 느끼며, 유불선(儒佛仙)을 통합하는 깊은 통찰을 얻으신 곳이라 합니다.
언니와 함께 이곳에 머물렀던 시간은, 마치 세 고승이 남긴 깨달음, 염원, 통찰의 흔적을 밟는 성스러운 순례와 같았습니다. 간월암의 밀물과 썰물처럼, 삶의 고통과 기쁨이 교차하는 순간에도 이 섬이 변함없이 굳건히 서 있듯, 우리에게도 진정한 위안과 지혜를 건네주는 듯했습니다.
절의 복전함을 보며 잠시 눈살을 찌푸렸던 저였지만, 그 작은 정성들이 네팔 초등학교 지원, 홍수 복구비 등 큰 선업(善業)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녹았습니다. 1000원짜리를 무심코 복전함에 넣은 사람들의 선한 마음이 모여 몇천만 원대의 돈으로 모여 먼 나라의 교육시설 건축, 수해복구비 등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수덕사였습니다. 만 공 선사의 흔적도 깊지만, 일엽스님의 자취가 더욱 진하게 남아있는 곳입니다 비록 덕숭산 정상까지 오를 시간은 없었지만, 절이 주는 엄숙함과 청량함 속에서 마음이 절로 고요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절 특유의 맑은 기운은 우리를 감싸 안아주었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수덕여관과 이응노 미술관은 또 다른 감동이었습니다. 잘 보존된 초가지붕과 마당의 상형문자 같은 암각화는 멋진 예술작품 같았고, 미술관에서 본 이응노 화백의 추상적인 습작들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했습니다.
아침 5시 40분에 시작하여 밤 8시 30분에 마무리된 길. 언니와 함께 걸었던 이 길은,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깨달음을 찾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가장 따뜻하고 소중한 순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