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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Jul 21. 2022

아웃팅

사케에 폭풍 같은 웨이터 애쉬가 들어왔다.

네팔 여행 때 만났던 친구 호주 친구들 브리와 매디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둘이 여행을 마치고 얼마 전 멜버른으로 돌아와 막 집을 구했다고 했다. 돈이 쪼들려 잠깐 방세를 보태 줄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방은 두 개였지만 거실이 넓어서 간이침대 놓고 지내면 된다고 했다. 기쁜 마음으로 그들과 합치기로 했다. 글렌 웨이벌리는 모든 게 불편했다. 교회도, 한 침대를 쓰는 것도, 집과 사케를 오가는 긴 통근도 견디기 힘들었다. 시내에서 글렌 웨이벌리까진 전철로 40분이 걸렸고 버스까지 갈아타야 했다. 정거장 표시도 없는 도로 한 복판에 내리면 신호등 없는 캄캄한 도로를 건너야 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문을 두드려 사람들을 깨우곤 했다.

브리와 매디의 집은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뉴마켓 Newmarket이란 동네에 있었다. 간이침대는 캠핑장에서나 쓸 법한 접이식이라 몸을 채 펼 수 있는 길이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수건을 베개 삼아 누워 웅크린 잠을 잤고 캐리어 하나에 의지하고 살았지만 이 것도 나에겐 큰 개선이었다. 거실은 반질반질한 나무 바닥이었고 주방을 사이에 한가운데에 벽난로가 있었다. 거실의 프렌치도어를 열면 작은 마당이 나왔다. 마당에는 나무 데크가 있어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앉아 있으면 소풍 기분 내기 그만이었다. 화장실 벽과 바닥은 깨끗한 타일로 덮여 있었고 그럴듯한 욕조도 있었다. 이런 집을 구한 게 그들에게도 행운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과의 동거는 금방 틀어졌다. 배낭여행 중에 만나 몇 번 어울리며 금방 형성했던 연대감은 현실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호주에 오면 다시 만나자는 기약은 빈말로 넘어갔어야 했다. 그들도 사회로의 복귀가 버거웠던 것 같았다. 다시 만났다는 흥분은 잠깐이었고 문화와 언어가 다른 룸메이트라는 스트레스만 남게 되었다.

하루는 매디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여자들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며 집을 비워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일하는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무작정 나가 멜버른의 거리를 배회했다. 걷는 게 좋아서 쉬는 날마다 하는 일이었지만 좀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날이 어둑해지고 추워지자 맥도널드에 들어가 인터넷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매디에게 집에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파티는 오래전에 끝났다고 했다.

그들과는 한 달만 지내기로 처음에 얘기가 됐다. 그 시간이 다 돼가자 집은 구하고 있냐는 눈치를 받기 시작했다. 집 구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시내에 가까우면 여지없이 창문 하나 없는 빈민굴 같은 집이었고, 좀 싸고 괜찮은 곳은 너무 멀었다. 결국 나는 약속한 날짜에 무작정 나갈 수밖에 없었다. 갈 곳은 호스텔뿐이었다. 나는 다시 짐가방에 모든 것을 싣고 떠났다.

시내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호스텔을 잡았다. 사케에서 트램으로 몇 정거장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호스텔엔 워킹홀리데이를 온 서양인들로 가득했다. 1층 로비는 언제라도 파티가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내가 들어간 도미토리에는 조용한 프랑스 커플이 있었다. 남자는 프랑스에서 앰뷸런스를 운전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여자는 사우스뱅크 푸드코트에서 트라이얼을 했다가 일이 너무 힘들어 나왔다고 했다. 방에는 화장실이 딸려 있었는데 이는 편의라기보단 흠이었다. 소리가 다 들렸기 때문이다. 누군가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 물을 틀어 놓고 큰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리를 가리는 대신 두 가지 소리가 따로 시끄럽게 잘 들렸다. 나는 이 호스텔에서 내 생일을 맞았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도미토리 문에 생일을 축하한다며 안내 데스크에서 선물을 받아가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호스텔 직원이 작은 케이크를 주며 해피 버스데이를 외쳤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보며 축하한다고 웅얼거려 줬다. 나는 방에서 혼자 케이크를 먹었다.

“Happy birthday, Jeehoon!”

사케에 출근하자 앤이 마카롱 한 상자를 주었다. 페이스북으로 본 모양이었다. 앤은 외식 업계에서 꽤 오래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도 잘할 뿐 아니라 동료들과의 유대를 소중히 할 줄 알았다. 식당이나 카페 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해할 것이다. 그런 곳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우정은 유난히 두터워지곤 했다. 고생스러울 때의 처절함과, 즐거울 때의 깨가 쏟아지는 기분을 서로가 가장 잘 알아주기 때문일 것이다.

앤이나 벤 같은 이들은 내게 먼저 말을 걸어 주고 친절을 베풀었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살갑게 굴지를 못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 위축도 됐지만 동정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군가의 도움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 되기 싫다는 자존심을 나는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내가 나를 불쌍하게 보기 때문에 남도 나를 그렇게 보리라는 착각이었다.

호스텔에서 내 생일을 맞았다. 내 이름은 영어로 언제나 철자가 틀렸다.

애쉬라는 웨이터가 새로 들어왔다. 그의 존재감은 사케에서 전례가 없던 것이었다. 유감없는 게이 에너지를 발산하며 동료들을 웃기고 손님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친구였다. 애쉬가 담당하는 테이블은 언제나 폭소가 터졌고 여자 스태프들은 애쉬와 쑥덕공론하길 좋아했다. 미디어에서 종종 정형화하는 게이 캐릭터가 있다면 바로 애쉬였다. 모든 사람들을 ‘달링', ‘하니'라고 불렀고 목소리, 손동작, 걸음걸이 하나하나 여지가 없었다. 자기 테이블에 음식이 늦거나 문제가 생기면 깨방정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쉬도 자기의 그런 모습을 철저히 자각하고 있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켜야 할 줄도 알았다. 애쉬가 바에서 급하게 뭔가를 부탁하자 벤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If you speak normally.”

“Excuse me?” 순간 애쉬의 눈에서 살기가 뻗쳤다. “Don’t you ever fucking talk to me like that.”

금요일 저녁 장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홀을 제 손아귀처럼 조물거리며 동분서주하던 애쉬가 지친 몸을 쉬러 바에 들렀다. 애쉬만큼 모든 걸 바쳐 일하는 사람도 보기 힘들었다.

음료를 마시며 한숨을 돌리던 애쉬가 내게 말했다. “Are you going out tonight, Jeehoon? Meeting any girls?”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배시시 웃었다.

“Are you gay?” 애쉬가 물었다.

순간, 나는 긍정도 부정도 못하고 경직된 미소만 지었다.

“Oh, my god, you’re gay!”

애쉬는 어떻게 나를 꿰뚫어 봤을까? 몸짓? 말투? 수줍음? 아니면 말로 하기 어려운 어떤 총체적인 것?

그렇다고 일하는 데서 꽥 소리를 지를 것까진 없었다. 이런 게 아웃팅이었다. 애쉬가 누구보다 조심했어야 했다. 당사자는 가만있는데 게이라고 떠드는 것은 함부로 할 짓이 아니었다. 애쉬 본인에겐 얼마나 떳떳했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진 몰라도 모두가 그와 같을 순 없었다.

그러나 당황스러움은 잠깐이었다. 순간이 지나니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부끄러움으로 죽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눈총을 받지도 않았다. 나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용기와 부추김, 혹은 다른 게이의 방정맞은 입이었다. 문을 벌컥 열어 앓던 이를 쏙 뽑아 준 기분이었다. 망설이며 두려움만 더 키우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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