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이자까야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멜버른에서도 비슷한 일을 찾으려고 했다. 술을 파는 사업장에서 일하려면 RSA(Responsible Service of Alcohol)라는 자격증이 필요했다. 두세 시간 정도의 교육을 받고 간단한 시험에 통과하면 바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교육장은 호주 젊은이들과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들로 가득했다. 교육관은 수백 번이나 똑같은 강의를 하느라 도가 텄는지 말이 너무 빨랐고 낯선 호주 억양까지 더해져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So the alcohol consumption in Australia…”라며 처음 몇 단어로 운을 떼면 나머지는 말인지 주문인지 모를 정도로 웅얼거려서 정자체가 점점 지진계 그래프로 변하는 것 같았다.
말은 잘 안 들려도 내용은 눈치껏 쉽게 알 수 있었다. RSA에 'Responsible'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만큼 호주에선 술을 제공하는 사람이 손님의 음주량을 조절해야 하는 책임 같은 것이 있었다. 이미 취한 사람이 술을 더 시키려고 하면 물을 마시라고 하거나 말을 돌리는 등 대응하라는 내용을 배웠다. 큰 바나 클럽을 가면 보통 입구를 지키는 경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신분증을 확인하는 이외에도 만취한 사람의 입장을 막는 일도 했다. 업소에 들어가려고 하면 경비들이 가끔 "How are you?" 하며 말을 걸 때가 있었는데 내 움직임이나 말투를 보며 술이나 약에 취하지 않았는지 떠보려는 까닭이었다. 경비와 실랑이를 벌이는 광경은 호주의 밤거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놀러 나갈 때마다 경비와의 크고 작은 마찰을 직간접으로 겪곤 했다. 일행 중 한 명이 너무 취했다고 들여보내 주지 않는데 계속 개기다 경비의 주먹을 맞아 코피를 흘린 적도 있었고, 어떤 친구 하나는 너무 늙어서 못 들어간다고 한 적도 있었다. 줄리아의 말에 따르면 가장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은 경비들 자신이라고 했다.
우리는 옆 사람과 짝을 지어 술 취한 손님과 직원의 역할극을 해야 했다.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도 모자라 상황극도 벌이라고 하니 어색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갑자기 왁자지껄해지는 교육장에서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수업 끝엔 시험지를 받아 문제를 풀고 합격 여부가 결정이 됐다. 실제로 불합격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 친구 아들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사우스뱅크 Southbank에 있는 데판야끼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방일이 좋아 이름도 ‘칼’로 지었다고 했다. 그의 식당과 같은 건물에 있는 이태리 음식점을 갔다. 점심 스페셜 까르보나라가 싸고 맛있다고 했다. 나는 술집 일을 구하느라 RSA 자격증을 받았단 얘기를 했다.
“RSA 땄다고 일 구해지는 건 아니에요.” 내가 뭘 모른다는 듯 칼이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이 봐 왔다는 태도였다. 호주에 오면 일은 저절로 구해지겠지 싶은 환상에 젖은 한국의 젊은이들. 호주가 제 놀이터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한국인 사장 밑에서 푼돈 받고 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뻔한 전개. 칼의 냉정함도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호주가 나를 부른다는 환상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와 보지만 실제론 도와주는 사람도,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도 없다. 수많은 워킹홀리데이 봇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호주에 오기 전에 칼에게 미국 달러도 통용이 되냐는 멍청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은 생각보다 쉽게 구해졌다.
호주 구인 웹사이트에서 한 일식점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냈다. 곧 전화가 와서는 몇 시에 어디로 와서 면접을 보라고 했다(고 짐작을 했다). 영어로 전화 대화를 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을 보지 않고 말하기가 그렇게 힘든 줄은 처음 알았다. "옙, 음흠"만 반복하다 마지막에 지금까지 설명해 준 내용을 문자를 보내달라는 말로 상황을 모면했다. 이는 나중에도 요긴하게 쓰이는 기술이 됐다. 알아듣는 척하다 전화를 끊기 전에 자세한 내용은 이메일이나 문자로 남겨달라고 하면 다 해결됐다.
‘사케’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 이 역시 사우스뱅크에 있었다. 멜버른 시내 남쪽을 지나는 야라 강을 건너면 아트 센터 멜버른이라는 큰 공연장이 있었고, 그 건물과 사우스뱅크가 만나는 지점에 식당 공사가 한창이었다. 아트 센터 로비에서 바 매니저 알렉스를 만났다. 내가 펍에서 일한 경력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펍이라고 해 봤자 이태원 외국인 술집이었고 호주에서 일을 구하려면 호주 경력이 있지 않고는 아주 어려웠는데 알렉스는 한국에 호감이 있어서 나에게 기회를 줬던 것 같았다. 이태원에 가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자기 형은 삼성에서 일하고 한국 사람과 결혼했다니 한국과의 인연이 꽤 큰 모양이었다. 명색이 일식이다 보니 동양인 직원을 둬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면접이 끝나고 이메일로 계약서를 받았다. 식당 파트타임 일에 수십 장의 계약서를 받아 서명을 한다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알고 보니 사케는 거대 외식업 그룹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사우스뱅크에는 이미 이 그룹이 소유한 식당들이 몇 있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동네 일식집이나 이자까야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호스트와 호스티스들이 자리를 안내하고 하우스 음악이 쿵쿵 거리는 ‘모던 재패니즈 다이너’였다.
집 사람들에게 일을 구했다고 하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무엇보다 급여에 관심이 많았다. 시급은 23불 정도였는데 바리스타로 일하는 남자조차 받지 못하는 돈이었다.
사케에 들어갔을 때의 안도감과 자랑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아직도 대학 입학과 사케 취직을 든다.
식당 공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 모든 스태프들이 식당에 모여 교육을 받았다. 같이 일할 사람들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는 자리였다. 시드니 본점에서 출장을 온 사케 소믈리에로부터 술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사케에는 프리미엄으로 여겨지는 ‘긴조', 슈퍼 프리미엄으로 여겨지는 ‘다이긴조' 등의 종류가 있다고 했다. 사케는 전혀 아는 게 없었지만 일본어와 한자를 조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배운 것은 잘 기억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일을 시작하고 나서 사케 주문을 받으면 모두가 병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영어 라벨을 찾을 때 나는 한 번에 골라 잡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사케만큼 와인에도 아는 게 없었다. 레드와 화이트만 알았지 품종에 따라 더 세분화된다는 것도 처음 배웠다. Sauvignon Blanc이라는 화이트 와인을 ‘블랑크'라고 발음했다가 웃음을 산 일도 있었다. 사케에 취직하기 전 술집들을 찾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하던 때가 있었다. 한 와인바에 들어가서 이력서를 냈더니 시험지부터 쥐어주는데 레드와 화이트 품종을 각각 세 가지 써보라는 문제를 보고 가게에서 쪼르르 나왔던 일이 있었다.
새 술을 깔 때마다 다 같이 시음을 했다. 나는 한두 잔을 마시다가 내 한계임을 알고 멈췄다. 입에만 머금다 통에 뱉어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손님들에게 설명할 줄 아는 게 중요하다며 소믈리에는 맛을 표현하라고 시켰다. 고소한 맛이 나는 건 ‘Earthy’나 ‘Nutty’와 같은 형용사를 붙였고, 달착지근하면 ‘Fruity’와 ‘Floral’ 등의 단어를 썼다. ‘Dry’하다는 표현도 빠지지 않고 쓰였다. 알코올 특유의 알싸한 냄새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걸 견디지 못해서 술을 잘 안 마시는데 반면에 즐기는 사람들은 드라이한 술만 찾았다. 그래서 마티니도 드라이하게 마시는 것이었다. 아사히 맥주에 쓰여있는 가라구치辛口 역시 그 드라이함을 말했다.
개업이 며칠 안으로 다가오자 우리는 바 안을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을 하며 영어로 말하는 것이 멀티태스킹이라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고 있으면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식당에서 일하려면 의사소통이 중요했다. 그것도 주방, 홀, 바가 나뉘어 수십 명이 동분서주하는 곳에서는 더욱 그랬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