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케에서의 어려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식기세척기는 두 개로 늘어났지만 잔 닦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퀭한 눈으로 나타나는 날이 많아졌다. 그가 일하는 걸 보면 짜증이 났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급한 일과 안 해도 되는 일을 구별할 줄을 몰랐다. 어쩌면 내 한국인 천성 인지도 몰랐지만 그의 굼뜬 움직임을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제일 싫었던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팀이었다. 근무 시간표에 팀과 같이 일하는 날이 보이면 나는 미리 스트레스를 받았다. 팀은 쓰레기통이 다 찰 즈음에는 쓰레기통을 비우라고 잔소리를 했고, 세척기가 다 끝나갈 즈음에는 세척기가 끝났으니 꺼내라고 잔소리를 했다. 자기가 일을 제일 잘하는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잔이 너무 많이 쌓여 나와 데이비드가 허우적대고 있을 때 그가 유세를 떨며 설거지를 도왔던 일이 있었다. 셔츠를 걷어붙인 팀은 잔을 세척기에 쑤셔 넣으며 억지로 작업대를 비웠다. 그리고 우릴 한심하다는 듯 보며 말했다. “See? Easy!”
매니저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재수 없는 짓을 했다. 홀 매니저 캣은 서빙하는 스태프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살피길 좋아했다.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림자처럼 숨어서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면서 주변시로 스태프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얼굴은 여유를 가장한 미소로 뻣뻣했고, 자세는 올림픽 선수가 체조대에 뛰쳐나가기 직전처럼 꼿꼿했다. 서빙을 마친 스태프가 테이블에서 멀어지면 그녀는 스태프에게 다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했다. 경직된 얼굴에 거의 복화술에 가까운 화법이었다. 내가 홀에 잠깐 나오기라도 하면 캣은 꼭 빈 식기들을 거둬가라고 시키며 말했다. “Open your eyes, Jeehoon!”
소믈리에 앤서니는 쉬는 시간이면 꼭 바에 들러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먹었다. 호주에서 아이스커피란 우유와 아이스크림이 들어간 파르페 스타일의 음료였다. 앤서니는 우유 대신 꼭 두유를 썼고 아이스크림을 정성스러운 모양으로 쌓은 뒤 그 위엔 칵테일 체리를 올렸다. 저 먹을 음료에 체리 장식을 고집하는 건 또 무슨 허센가 싶었다.
알렉스는 나와 한국으로 통하는 게 있어서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매니저였다. 그런 알렉스도 나를 괴롭게 한 일이 있었는데 한창 바쁜 저녁에 직접 바텐딩에 나섰던 날이었다. (알렉스가 바에 서는 일은 드물었다.) 정장 재킷까지 벗어던지고 현란한 동작으로 칵테일을 섞던 그가 병으로 그만 와인 거치대에 걸려 있던 잔을 박살 낸 것이다. 산산조각이 난 유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작업대와 바닥은 물론이고 얼음이 담긴 싱크까지 싹 치워야 하는 재앙이었다. 주문은 들어오고 있었기에 알렉스는 계속 술을 만들어야 했고 나 혼자 미친 듯이 청소를 하고 새 얼음을 퍼와야 했다.
매니저들은 Front of house 스태프들, 즉 홀/바 스태프들과 호스트들이야말로 식당의 얼굴이라며 치켜세우길 좋아했지만 결국은 손님들한테 잘 굽실거리라는 닦달이었다. 새로 문을 연 식당이라 각종 매체들, 블로거들, 온라인 리뷰에 목을 매는 때였다. 2층에 있는 사무실을 가면 매니저들이 게시판에 붙여놓은 리뷰들을 볼 수 있었다. 어떤 리뷰는 웨이터가 음식을 갖다 주며 ‘Thingy(뭐시기)’라고 설명한 걸 불평했고 담당 웨이터는 경고를 받았다. 백인들에게 일식이란 여전히 익숙지 않은 음식이었다. 음식을 내올 때마다 우리는 들어간 재료는 무엇이고, 어떻게 먹어야 한다는 설명을 늘어놓아야 했다. 사람들은 ‘Sake’를 ‘사키'라고 발음했고 ‘아사히', ‘기린', ‘삿포로' 등의 맥주를 ‘아싸히', ‘키륀’, ‘삿풔뤄'로 불렀다. ‘덴푸라'는 ‘템퓨롸'가, ‘사쿠라'는 ‘사큐롸'가 됐다. 날 생선이란 여전히 상상도 못 하는 인구가 절반이었을 것이다. 그걸 ‘노리'라고 하는 검은 종이에 싸서 먹는다는 건 더더욱 믿기지 않는 식문화였을 것이다. 호주에서 사케 정도의 식당을 찾는다는 건 문화와 유행을 즐기는 부류라는 뜻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온라인 리뷰는 그냥 콧웃음으로 넘기기엔 영향력이 꽤 있었다. 식당과 음식 비평은 더 이상 극소수의 평론가의 몇 마디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힘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인플루언서'라는 단어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벤은 사케에 불만이 많았다. 매니저들은 모두 오만하고 돈에 집착하는 인간쓰레기로 보았다. 식당이라는 하찮은 테두리만 벗어나면 시정잡배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 매니저란 직함이 있어서 잘난 줄 안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권위가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마치 군대 조교를 사회에서 만나는 것과 같았다.
벤은 웬만한 매니저들보다 나이도 많았을 뿐 아니라 스페인의 삶을 항상 그리워했기 때문에 견디기를 더 어려워했던 것 같았다. 벤은 바텐더 레이철과도 사이가 나빴다. 레이철은 자기가 여자고 어리다고 벤이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벤에게 연장자의 고집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레이철도 일하기 쉬운 성격은 아니었다. 레이철은 어느 날부터 배가 볼록하게 나오기 시작하더니 임신의 사실이 분명해졌고 그에 따라 기분도 쉽게 오락가락했다. 싱글맘이 되어 만삭에 가깝도록 일을 나와야 하는 사정은 딱했지만 괴팍해지는 그녀와 같이 일하는 것도 나는 불만이었다.
벤은 결국 사케를 나갔다. 다른 바텐더들에게는 근무 시간이 더 많아지니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보통 주 30시간 정도가 나왔다. 나 같은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는 주 40시간 법정 노동시간을 최대한으로 채우고 싶은 게 당연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매주 바뀌는 시간표를 다른 일과 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호스텔에서 나와 새 집을 구했다. 켄싱턴이라는 동네 고층 아파트였다. 렌트를 하고 있는 사람은 마케팅 회사를 다니는 폴이라는 30대 남자였다. 내 수준에는 너무 비싼 곳이었지만 다른 집을 보러 다닐 기력이 없었다. 싸고 가깝다 싶은 곳은 여지없이 창문 하나 없는 시궁창이었고 좋은 환경을 찾으려면 아주 멀리 가야 했다. 그래서 집을 보러 간 날 바로 이사를 결정했다.
아파트 발코니에 나가면 플레밍턴 레이스코스Flemington Racecourse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호주에서 가장 큰 경마가 열리는 곳이었다. 경치는 좋았지만 여름엔 파리가 많이 꼬였다. 로비를 내려가면 허접하게나마 기구를 몇 개 갖춘 헬스장도 있었다. 폴의 방엔 화장실이 딸려 있어서 거실 화장실은 나 혼자 쓰는 셈이었다. 일주일 방세 220불은 큰돈이었지만 가구가 다 있어서 캐리어 하나로만 왔다 갔다 하는 나에게는 편했다.
폴은 아침에 일어나 스무디로 아침을 먹었다. 매일 블랜더 소리에 깨고 나면 곧 아파트는 고요해졌다. 폴이 나가면 아파트는 하루 종일 나 혼자 썼고 그가 퇴근하기 전에는 내가 출근을 했다. 둘 다 집에 있는 날이면 거실에 앉아 마냥 티브이를 봤다. 나도 친구가 없는 편이었지만 폴도 사교활동이란 게 거의 없어 보였다.
사케에서 저녁 시프트를 준비하는 어느 날이었다. 모두가 바를 쑤시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타이밍이었다. 물과 얼음을 퍼가는 스태프들도 있었고, 카페인 충전을 해야 한다며 커피를 만들어 먹는 매니저들도 있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움직이기조차 못하고 있을 때였다. 팀이 나를 보고 말했다. “Jeehoon, please don’t just stand there doing nothing.”
약이 확 올랐다. 팀의 모욕을 참을 대로 참았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새 손에 뭐가 잡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속이 뒤집어졌다. 닦던 잔도 깨뜨려 버릴 것만 같았다.
다음 날 나는 총 매니저 엔다와의 시간을 요청했다. 대면이라면 질색이었지만 이번 일만큼은 꼭 말해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그동안 쌓였던 것을 모두 내뱉었다. 팀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견디기 힘들고 데이비드의 무능함 때문에 내 일이 배로 힘들다고 했다. 사케에서 일하게 된 기회는 감사하지만 어제 팀의 말 때문에 모든 의욕을 잃었다고 했다.
엔다는 정중히 내 얘기를 들었다. 자기가 미안하다며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했다. 일은 계속하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퇴직 통보라고 단호히 말했다. 사원증을 반납하고 내 물건을 챙기러 온 것이라 말했다. 2주의 시간을 주는 게 관습이었지만 나는 하루라도 더 남을 생각이 없었다. 할 말 다 해놓고 다시 팀과 데이비드랑 같이 일하는 게 말이 되나? 2주 통보는 고용자 좋으라고 있는 것이었다. 꼭 따라야 할 의무는 없었다.
“How are you going to pay the rent?”
집에 돌아와 퇴직 소식을 전하지 폴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기도 전에 방세부터 걱정하는 게 섭섭했지만 우린 친구사이가 아녔다. 나는 금방 다른 일을 구하겠다고 안심을 시켰다.
일은 잘 구해지지 않았다. 내 눈이 너무 높아졌다. 나는 사케에서 받았던 돈을 기대했지만 그만큼 주는 곳은 드물었다. 그리고 여섯 달 남은 비자도 불리했다. 고용주들은 더 오래 일할 사람들을 원했다.
몇 군데 면접 끝에 들어간 곳은 ‘수라’라는 이름의 한식당이었다. 수라는 하버 타운 Harbour Town이라는 쇼핑센터에 있었다. 그렇게 꺼리던 한국인 가게에 들어간 것은 일이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수입 없이 방세를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뭐라도 일을 해야 했다. 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손님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버 타운은 멜버른이 야심 차게 개발한 쇼핑가였는데 위치가 문제인지 통 사람들의 발길을 끌지 못하고 망해가는 관광지였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꽤 몰렸지만 평일엔 유령도시와 같았다. ‘멜버른 스타'라고 하는 대형 관람차도 시큰둥했다. 게다가 수라는 2층 구석진 공간에 있었다. 점심에는 두세 무리 정도의 손님이 다였다. 너무 할 일이 없어 전단지 돌리는 임무까지 주어졌다. 우리는 하버 타운 입구에 서성이며 “새로 연 한국식당이에요! 어서들 오세요!” 하며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쥐어주었다.
그러나 안 될 곳은 안 되는 법이었다. 전단지 홍보에 성공해서 장사가 흥했단 얘기는 요식업 역사를 통틀어도 없을 것이다. 수라도 금방 나왔다.
더 일을 구하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하자 호주에 더 남고 싶은 마음이 달아났다. 여기까지 하고 그만 학교로 돌아가자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