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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Jul 17. 2022

일식당의 사람들

바백 Bar-back은 아주 천한 직위였다.




바 팀에는 매니저 알렉스, 부 매니저 팀, 바텐더 셋, 바백 Bar-back 셋이 있었다. 우리 바백이 술을 준비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설거지, 쓰레기통 비우기, 냉장고와 얼음 채우기 등 허드렛일에만 집중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손님과 인생 얘기를 나누며 잔을 닦다가 어쩌다 한 번 맥주를 따르고 어쩌다 한 번 칵테일을 만들곤 했다. 현실에서 그런 여유란 있을 수 없었다. 주문은 눈코 뜰 새 없이 쏟아졌다. 와인이나 맥주는 잔에 따라 나가면 그만이지만 칵테일 주문이 들어오면 바텐더는 초집중의 무아지경에 빠졌다. 바마다 자기들만의 칵테일 레시피가 있었기 때문에 바텐더는 그걸 정확히 외우고 만들어야 했다. 거기에 장식도 예쁘게 만들어 올려야 했다. 오렌지 껍질 장식을 만들려다가 마음이 급해 필러로 자기 손을 벗겨버렸단 얘기는 누구나 들어 봤을 법한 바 괴담이었다.

정신없이 칵테일을 만들다 보면 장식쯤은 소홀히 할 수도 있었는데 알렉스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팀이 만든 칵테일이 손님에게 내어가려던 중 알렉스가 그걸 보고 도로 회수해 오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는 팀의 패션푸르트 장식을 냅다 던졌다. 말라비틀어진 과일을 손님에게 내어가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었다. 신선도가 떨어진 패션프루트는 쭈글쭈글한 게 크기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꼭 불알을 떠오르게 했다.

바는 터무니없이 좁고 불편했다. 바텐더가 둘만 서 있어도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바는 한쪽이 막힌 구조였는데 바백들은 열린 쪽에 서서 몰려오는 잔들을 받아 처리해야 했다. 식기세척기 하나로는 감당이 안 되는 양이었다. 설거지 감은 와인잔과 물 잔이 대부분이었는데 둘 다 입이 좁고 몸통이 긴 모양이라 안쪽에 남은 물기나 얼룩을 닦기가 너무 힘들었다. 사케 같은 수준의 식당에서 유리잔에 얼룩이나 지문이 보이는 것은 불알 모양 칵테일 장식만큼이나 금기되는 사항이었다. 그나마 실내가 어둑해서 잘 안 보였지만 어떤 매니저들은 전등을 향해 잔을 치켜들며 일일이 검사하는 까탈을 부렸다. (그리고 다시 닦으라며 빼놓으면 차라리 잔을 깨트려 없애 버리고 싶었다.)

동료 바백으로는 카왈과 데이비드가 있었다. 인도인 카왈은 탄탄한 어깨에 반짝이는 하얀 이를 가진 잘생긴 친구였다. 자신감이 넘치고 언변이 좋아서 자연스럽게 바백의 리더 행세를 했다. 데이비드는 팔에 트라이벌 문신을 한 작은 체구의 백인이었다. 그게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다. 꼭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에드워드 노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카왈은 바백이면서 바텐더의 에너지를 풍겼기 때문에 그 중간쯤 되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됐다. 바텐더들을 보조하면서 데이비드와 나에게는 일을 할당하는 것이었다. 그게 곧 우리 셋의 역할로 굳어졌다. 나와 데이비드는 식기세척기에 붙어 끊임없이 잔을 씻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데 반해 카왈은 출력기에서 나오는 주문지를 바텐더에게 읽어 주고 우리에게는 일을 지시했다.

잔을 닦는 건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다른 일을 못할 정도로 양이 많았다. 잠깐 손을 놓으면 잔은 수북하게 쌓였다. 더 이상 둘 곳이 없어 잔 위에 잔을 올리는 위험천만의 광경이 보일 때도 있었다. 어떤 웨이터들은 잔을 트레이 채로 내려놓고 가는 성가신 짓을 하기도 했다. 쓰레기통은 아트 센터 내 대형 처리장으로 가져가 비워야 했는데 쓰레기통을 바닥에 끌면 물기가 남거나 긁힌다며 매니저들은 그걸 들게 했다. 그렇다고 운반할 수 있는 수레 하나 마련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빈병이 가득한 쓰레기통을 처리장까지 들고 간 뒤 사람 키만 한 높이의 덤프에 올려서 비워야 했다. 병이 떨어지면서 나는 소음은 귀청이 떨어질 정도였다. 다른 식당 직원이 그걸 보더니 다음부턴 귀마개를 끼라고 알려줬다. 청력이 다칠 수도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매니저들에게 말 한 번 하지 못했다. 유난을 떤다거나 불평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쓰레기통은 과일 껍데기, 병뚜껑, 술 국물로 엉망이었다. 씻어봤자 더러워지는 건 순식간이니 그 냄새나는 걸 두고두고 썼다.

고단한 쓰레기통 비우기의 임무를 맡겠다며 가끔 데이비드가 나설 때가 있었다. 한 번 가면 데이비드는 어지간히도 시간을 끌다 왔는데 항상 담배 냄새가 났다. 잠깐만 화장실을 갔다 와도 난장판이 되는 저녁 시프트에 데이비드는 자리를 비우곤 했다. 출근할 때 보면 술인지 약인지 뭔가에 절어 오는 것도 같았다. 흐리멍덩한 눈과 둔한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바와 홀이 이어지는 복도는 1층에서 손님에게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홀 스태프들은 여기에서만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곧 주변이 스태프들의 잔으로 가득 찼다. 콜라를 한 잔만 달라며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에는 바건, 혹은 소다 건이라는 신박한 기구가 있어서 손잡이에 버튼만 누르면 콜라, 스프라이트, 리프트(노란색의 레몬맛 음료), 진저에일, 탄산수, 토닉워터가 호스를 통해 콸콸 나왔다. 이걸로 마음껏 음료를 따라 주고 싶었다. 일하는 중에 마시는 콜라가 얼마나 달콤한지 알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설거지 감이었다. 한 입 먹은 잔은 고대로 우리의 일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저 딴에는 같은 잔을 계속 쓰겠다고 싱크대 한 구석에 놔뒀지만 모두가 그러고 있으니 우리 작업 공간은 뒤죽박죽이 됐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쓴 잔은 바로 세척기에 넣는 배려까지 보였지만 어쨌거나 가장 힘든 작업은 잔을 닦는 부분이었다.

바 스태프들은 다른 사람들이 바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좁아터진 데다 사방이 유리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부 매니저 팀의 텃세가 단단했다. 언제나 이인자들이 같잖은 권력에 취하기 마련이었다. 누군가 바에 한 발짝이라도 들이면 팀은 꼭 잔소리를 했다. 그걸 막지 않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외부 스태프들이 절절대는 모습을 팀은 은근히 즐겼다. 예쁜 여자들에게는 그 거드름이 더욱 꼴불견이었다. 장사가 시작되기 직전이면 홀 스태프들은 바를 먼지가 나도록 드나들었다. 테이블을 차릴 잔들을 챙기고 주전자에 물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바에서 나오는 물이 가장 차가웠기 때문에 모두가 바 꼭지를 쓰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바에 들어오는 것은 팀에게 잘 보이는 몇 명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이었다. 웨이터 에마가 그중 한 명이었다. 에마가 주전자를 양손 가득 들고 바에 들어오면 팀은 끈적하게 말을 걸곤 했다. 에마는 팀의 시답잖은 수다에도 경쾌하게 응대해 줬다. 그녀에게는 주전자에 얼음을 담을 수 있는 프리미엄까지 주어졌다. (그러나 얼음을 채워야 하는 건 바백의 몫이었다.) 주말에 뭘 했네, 뭘 먹었네 잡담을 나누다 볼일을 마치는 순간 에마는 바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포니테일이 살랑거렸다.

“She’s a fucking whore.” 멀어지는 에마를 보며 팀이 말했다.


다음 날 장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웨이터 앤이 바에 들렀다. 앤에게 내가 말했다. “Can you believe what Tim said?”

앤은 사케에서 내가 가장 친하게 지내는 동료였다. 앤은 붙임성이 좋아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는 사람이었다. 앤은 모두에게 친절했고 모두가 앤을 좋아했다. 앤은 나를 볼 때마다 "안녕하세요!"라고 꼭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베트남계 호주인인 앤은 체구도 작고 행동이 귀여워서 첫인상은 마냥 여자애 같았지만 조금만 일을 해 보고 대화를 나눠 보면 깊은 속이 느껴졌다. 나이도 실제로 나보다 많았다. 팔 군데군데 보이는 문신도 의외의 성숙함에 한몫을 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한 한국인 누나가 사케에 들어왔을 때 앤은 언니 언니 하며 따라디니길 좋아했다.

팀의 막말을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앤에게 불평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앤은 이렇게 대답했다. “But she is a whore.”

에마는 눈웃음이 많은 홍콩 여자였다. 통통하고 키는 조금 작았는데 남자들이 유독 에마 얘기를 많이 했다.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했던 것이다(라고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내게 여자 몸매란 전혀 인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바텐더 벤은 그런 엉덩이를 보면 미치겠다고 했다. 여기엔 알렉스도 한몫을 거들었다. 알렉스는 가끔 내가 있을 때 한국말로 "섹시한 엉덩이", "변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우리끼리만 알아듣는 암호처럼 야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엉덩이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에서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울 줄은 몰랐다. 가끔 홀에 나가면 손님에게 붙잡혀 주문을 받을 때도 있었다. 바에 갇혀서 허드렛일만 하는 게 내 임무였는데 나가야 할 음료가 너무 많이 쌓이면 서빙도 가야 했다. 나한테 디저트에 대해 물어보는 손님이 있어서 한 웨이터에게 ‘파티쉐'가 어딨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웨이터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파티쉐', '파티셰'의 여러 가지 발음을 시도하다가 ‘디저트 메이킹 퍼슨'이라고 말했더니 웨이터는 그제야 ‘페이스트리 셰프'를 찾느냐고 알아들었다. ('Pâtissier'라는 불어는 '파티시에'라는 발음에 가까웠다. 그래서 내 발음을 아주 못 알아들을 것도 아니었는데 영어권 사람들은 외국어도 영어 발음으로 해야 말이 통했다. 'Croissant'를 '크로이산트'라 하기도 하고, 'Paella'는 '파이엘라'가 됐다.)

포스기에 주문을 넣으려면 전자팔찌가 갖다 대야 했는데 이는 바텐더들과 웨이터들에게만 제공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웨이터에게 대신 주문을 넣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는데 그 문장이 도저히 영어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Order’라는 단어만 알았지 문장이 만들어지지가 않았다. 멍청하게 더듬거릴 바에야 아예 말을 말기로 했다. 그렇게 주문이 무시된 손님들이 몇 됐다.

식당에서 일한다는 게 주문받고 음식 내어가면 그만이지 싶기도 하지만 손님은 많고 메뉴는 생소하니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도, 요구하는 것도 많았다. 그래서 스태프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서로 얘기해야 했다. 손발만큼이나 입도 빨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음악 소리는 크고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매장에서 어버버 하는 나를 끈기 있게 기다려줄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나는 더욱 소심해져 입을 닫았다. 그렇게 나는 묵묵히 일만 하는 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좋을 때도 있었다. 고용자들은 불평 없이 일하는 사람들을 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래서 외국에서 근면 성실한 일꾼으로 꼽히기도 한다. 눈치가 빠른 게 사회생활 최대 미덕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 고용자들이 좋아하는 면을 갖췄다. 그러나 나는 내 뜻이 아니라 영어를 잘 못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싫었다. 카왈은 느긋이 일하며 바텐더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반면 나는 그런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힘들고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했다. 한 번 그런 인상이 굳어지면 사람들은 더 그런 일을 맡겼다. 하루를 마감하며 냉장고를 채우는 일은 모두가 눈치를 보며 꺼리는 작업이었다. 사명감에 충만해서 내가 몇 번을 했더니 어느 날 카왈은 어느 날부터 냉장고 마무리할 때가 되지 않았냐며 부추기기 시작했다. 냉장고와 음료 창고가 이어져있는 구조였다면 어렵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음료 창고는 통로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 먼저 바 냉장고에서 비는 술의 개수를 센 다음 창고에서 술을 가져와야 했다. 그리고 냉장고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앞에 있는 술을 꺼내 뒤쪽부터 채운 뒤 다시 앞에 차가운 술을 두어야 했다. 빨리 하지 않으면 걸리적거리기 때문에 잔소리 듣기가 쉬웠다. 그렇다고 실온에 있던 술을 앞에 채웠다가 누가 그걸 집기라도 하면 게으르다고 욕을 먹었다.

나는 바텐더 벤과 사이가 제일 좋았다. 벤은 세상 경험 많은 큰형 같은 사람이었는데 크루즈쉽에서 바텐더로 일하며 세계를 여행하다 왔다고 했다. 군대처럼 엄격하고 답답한 선박 생활이 싫어져서 이탈리아인 여자 친구를 데리고 멜버른에 돌아왔다. 그는 영국과 스페인에서 살았던 시절 얘기를 좋아했다. 영국에서는 술과 파티로 젊음을 보냈고 스페인에서는 따뜻한 지중해 햇살 아래서 세상 걱정 없는 삶을 즐겼다. 스페인인들처럼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도 없다며 호주 사람들 흉을 많이 봤다. 그럼 나는 벤이 뇌진탕이라도 걸려서 왔나 싶었다. 호주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였고 멜버른으로 말하자면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1위로 꼽히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호주가 싫다는 건 어떤 무릉도원에서 살았길래 싶었다. 벤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아무리 객관적 수치와 정보를 들이대며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해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멜버른에서 오래 살았고 너무 익숙하면 지겨울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복에 겨웠지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사케에서는 주 4일 정도 일을 받았다. 더블 시프트가 있으면 오전에 나와 가게를 열어야 했고 점심 장사가 끝나고 쉬다가 저녁에 또 일을 해야 했다. 그 두세 시간의 사이는 죽은 시간과도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근처 한적한 공간이나 푸드코트에 앉아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지루한 시간을 달랬다.

나는 이 시간에 사우스뱅크 산책하는 걸 좋아했다. 사케에서 시작해 강을 따라 난 산책로는 관광객과 길거리 공연자들로 북적였다. 아이스 초콜릿을 사들고 여기를 천천히 걷는 게 나에겐 최고의 호사였다. 야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고 유모차를 밀며 시내 구경하는 가족들은 정겨웠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조니 캐시를 열창하는 남자도 매일같이 보였고, ‘스트레스 테스트'라고 쓰인 가판대에 앉아 이상한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도 매일 같은 자리를 지켰다. (사이언톨로지를 홍보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우스뱅크를 끝까지 걸으면 DFO라는 큰 아웃렛이 나왔다. 버는 돈은 충분했고 아웃렛엔 탐나는 게 많았다. 갈 때마다 옷과 신발을 샀다. 가게에 돌아오면 사람들은 내 쇼핑백을 보며 또 아웃렛에 갔다 왔냐고 웃었다.



이전 02화 일식당에 취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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