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결심했다.
호주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시절 네팔과 인도를 여행하며 만난 한 무리 호주인들 덕분이었다. 모두 멜버른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들도 여행 중에 만난 사이라 고향 얘기로 유대감 쌓기에 바빴다. 어느 거리에 가면 어느 카페가 있고 내가 거기서 일했다, 나는 어느 동네에 살았다, 그 바는 아직도 있느냐, 는 식이었다. 나에게도 언제 한 번 멜버른에 오라고 면치레를 했다. 워킹홀리데이를 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일을 소개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들 중 한 명과 나는 잠깐 여행길을 같이 했다. 정신없이 말이 빠르고 명랑한 줄리아. 그녀는 끊임없이 재잘대길 좋아했고 말 끝엔 언제나 “Don’t you reckon?”이라고 내 반응을 구했다. 호주 사람들은 그렇게 ‘Think’ 대신 ‘Reckon’이라는 단어를 쓰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그렇다고 동의했다. 통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Don’t you reckon?” 덕분에 나는 문장이 끝났다는 신호만은 눈치채고 적절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둘이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가는 길이었다. 줄리아는 또 참새처럼 재깔이기 시작했다. 비포장 길 위를 덜컹거리는 트럭 안에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Yeah”와 “Mm hm”만 반복했다. 줄리아가 말했다. “Sometimes you seem to agree with me when you don’t understand what I’m saying.”
줄리아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행 동반자였다. 호기심 많고, 두려움 없고, 불평이 적고, 매사 긍정의 기운을 뿜었다. 내 한국어 가이드북을 본 줄리아가 우리가 도착한 도시를 두고 뭐라고 설명하고 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여자에게 위험할 수도 있는 곳이라고 쓰여있었다.
“Yeah, anywhere is dangerous for women.” 줄리아가 말했다.
워킹홀리데이를 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20대 때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국 여행 가기에 바빴다. 한국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았다. 비행기 타는 것도 재밌었고, 낯선 곳을 뚜벅뚜벅 걷는 것도 좋았다. 그 나이 땐 안 그런 사람이 어딨냐 뻔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안 그런 사람들도 있었다. 여행 한 번 갔다 올 바엔 성형수술이 더 남는 거란 사람들도 있었고, 외국 땅에 내렸을 때 그 막막함이 무섭단 사람들도 있었다.
워킹홀리데이가 지척이라는 걸 깨닫고는 빠르게 실행에 옮겼다. 학교엔 휴학 신청을 했고 비자를 준비했다. 호주를 가겠단 말에 어머니는 아는 사람을 소개해 줬다. 어머니 친구의 두 아들딸이 멜버른에서 주방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라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적잖이 안심이 됐다. 그 아들딸들이 다니는 교회 사람 중 하나가 하숙생을 구하고 있다니 내가 거기에 들어가면 되겠다고 얘기가 됐다.
2012년 7월, 손에는 짐가방을 들고, 등에는 배낭을 메고 멜버른으로 날아갔다. 공항에서 나를 픽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국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호주에 처음 오는 사람들을 공항에서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부업이 꽤 성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초록색 도요타 캠리를 타고 나는 글렌 웨이벌리의 하숙집을 찾았다. 한국인 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방이 세 개라 큰 방은 부부가 쓰고 나머지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 두 명에게 세를 주고 있었다. 나는 그중 한 명과 방을 나눠 쓰게 됐다. 방을 봤더니 침대 프레임도 없는 매트리스 하나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거기서 둘이 같이 자면 된다고 했다. 뻣뻣해지는 내 낯빛을 주인 여자가 봤다.
“띠로리… 충격받은 거 아냐? 갑자기 돌아간다고 하면 어쩌지? 하하.”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왔는진 모르겠으나 한 침대에서 둘이 자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주인 여자는 ‘띠로리’를 좋아했다. 놀람이나 걱정의 정서를 표현할 때마다 그 효과음을 넣었다. (띠로리를 검색하면 원곡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유치원 다니는 아들을 보느라 바쁜 전업주부였다. 회사에 다닌다는 남편은 거의 얼굴 본 적이 없었다.
방을 쓰는 남자들은 같은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이었다. 한 명은 여기서 고등학교를 나왔고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오고 바로 다음 날, 동네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그를 따라 어떤 카페에 놀러 갔다. 그는 커피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열정을 보였는데 그 집 바리스타가 유명한 사람이라며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기도 하고 커피 맛을 분석하기도 했다. 호주에는 커피를 진지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자동차 애호가들이 이태리 차에 열광하듯 커피 기계를 보며 열광했고, 커피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를 대단히 세밀하게 분석했다. 왠진 모르겠지만 동양인 남자들, 특히 한국인들이 커피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이곤 했다. 추출이니 템퍼링이니 하는 전문용어들은 한국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꼭 한 번씩 언급이 됐다. 어느 대회 우승자라는 사람의 가게를 찾아가 싱글 오리진과 블렌디드의 차이를 품평하거나 에스프레소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재며 서로의 커피 철학을 뽐내기도 했다.
나와 방을 쓰는 남자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하루 종일 학교에 있다가 저녁에만 집에 들어왔고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다. 그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음악 얘기를 하게 됐는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처음 만나는 사람과 “What is your hobby? What kind of music do you like?”와 같은 교과서 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룸메이트는 영어가 한국어보다 능숙한 사람이었고 나는 되도록 영어만 쓰겠다는 뜨내기의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쓰고 언제나 단정한 옷을 입는 그는 어딜 봐도 ‘교포’였다. 그가 듣는 음악은 오직 기독교 음악이라고 했다. 방 곳곳에는 기도 주제를 적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시민권을 취득하게 해 주세요.’ ‘호주에서 동성결혼이 허용되지 않게 해 주세요.’
집 사람들은 일요일은 물론이고 주중에도 몇 번씩 교회를 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게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나라에서 혼자 시작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이 교회 사람들이 주관하는 환영회에 가게 되었다. 막 멜버른에 온 초년생들을 불러다 김밥을 만들어 먹고 놀이를 하고 기도로 성령을 충만히 하는 자리였다. 이런 교회 모임이 아주 오랜만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성경학교, 야유회, 수련회, 달란트 시장, 수요예배, 금요예배, 송구영신 예배, 가정 심방 등 대한 기독교장로회에서 하는 것은 모두 하며 자랐다.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가 혼자 살게 되면서 교회가 귀찮아졌고 결국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기도 그만두었다. 환영회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그게 최소한의 예절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한 집에 사는 사람들이니 이 정도의 초대에는 응해야 할 것만 같았다. 사교활동일 뿐이라고 했다. 꼭 교회를 나오라는 것이 아니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같이 저녁을 먹고 친해지자는 뜻이라고 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나도 아니었다. 한 번 얼굴을 트면 교회에 나올 때까지 쉽게 놓아주지 않는 것이 전도의 기술이었다. 멜버른 시내에서 글렌 웨이벌리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환영회에서 만났던 사람이라고 했다. 대화는 곧 한국 사람들의 가장 뜨거운 이슈, 일자리와 교회로 흘렀다. 나는 일은 구하는 중이고 교회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제가 기도해 드릴 테니까 일 구해지면 교회 나오시겠어요?” 남자가 말했다.
뭐라 할 새도 없이 남자는 기도를 시작했다. 육성을 내어서 주변에 들리게 했다. 거리낌이 없었다. 저가 하겠다는 걸 막을 수도 없었다.
그 후에도 공공장소에서 전도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만났다. 한국인은 한국인을 알아보는 법이었고 혼자 벤치에 앉아 음악이라도 듣고 있으면 짝을 지은 남자 둘이 슬금슬금 다가오곤 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무슨 공부 하세요? 무슨 일 하세요? 내가 무어라 답을 하면 아, 그러시구나, 참 좋네요 라며 하나마나한 반응으로 얼버무린 뒤 예수님은 지훈 형제님을 사랑한다고 알려줬다. 예수는 수줍은 초등학교 여자애 같은 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을 시켜 사랑 고백하기를 좋아했다.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둘러대듯 이미 다니는 교회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럼 쉽게 놓아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어느 교회냐고 캐묻는 경우도 있었다. 글렌 웨이벌리의 어느 곳이라고 대답했다.
“거기 이단이에요.”
이단이란 단어를 들으면 나는 한복을 입은 광신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이 느껴진다며 울부짖는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단이란 '다른 교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