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지훈 Aug 13. 2022

다시 돌아간 멜버른.

일식당, 태국 식당, 나이트클럽, 카페에서 온갖 수모를 겪었다.

다시 호주에 가기로 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브리즈번에서 교환학기를 갔다가 돌아온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시 호주가 생각이 났다. 교환학생이라는 프로그램을 해보지 않고 졸업하기가 아깝게 느껴졌다. 교환학생을 신청하기 위해 토플을 봤다. 호주 곳곳에 우리 학교와 연결된 대학들이 있었는데 나는 주저 없이 멜버른으로 결정했다. 두 번째 가는 멜버른은 더 쉬울 것 같았다. 그리운 곳이었다.

계획은 학기가 시작되기 전 일찍 가서 일자리부터 찾는 것이었다. 학업엔 관심이 없었고 가서 일을 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사케에서 일했을 때의 풍족한 생활을 다시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호주에 왔다. 학교는 단지 비자를 위한 수단이고 돈벌이가 즐거워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학생 신분으로 노동시간은 2주에 40시간으로 정해져 있지만 현찰로 지불하는 사업장은 수두룩했다. 학업은 최소한으로 유지하며 최대한 일만 하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번 돈으로 학비를 낸다고 생각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 될 수도 있었지만 나는 한국 학교에 등록금을 낸 채였기 때문에 일단의 학비 걱정은 없었다.

University가 아닌 다른 교육기관들, 예를 들면 Institute나 College라고 하는 곳들은 등록금이 훨씬 쌌다. 규모나 시설은 훨씬 덜했고 운영도 엉성했지만 애초에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면 가장 싼 곳에 등록을 하고 주야장천 일을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멜버른에서의 첫 거처는 지난번과 같은 호스텔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컴퓨터를 두드리며 구인공고를 찾았다. 가능하면 현장이 아닌 인터넷으로 지원하고 싶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매장에 들어가 이력서를 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떨리는 일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가게에 들어가 “Hi, I'm looking for a job”이라며 이력서를 내야 했는데 나를 손님인 줄 알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다가 태도가 돌변하며 “No”라고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 같은 사람을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이력서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쩔 땐 매니저와 바로 얘기를 나누고 트라이얼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했다. 손님들이 몰리는 출근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피해 가는 것이 가장 좋았다.




나는 결국 사케를 다시 찾았다. 끝은 좋지 않았지만 일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2년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케는 거의 변한 게 없어 보였다. 내가 앞치마를 집어던지고 나왔을 때 망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나 보다. 스시 셰프 류지가 아직도 있어서 인사를 하며 아는 체를 했다. 전에 일했던 사람 티를 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웨이터 리사도 보였다. 채식주의자였던 리사는 직원 점심으로 나온 생선 머리 찌개를 보고 “Disgusting”이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곳에서 2년을 일한 것이다. 의외의 얼굴이라 "You’re still here!"라며 인사를 했더니 리사는 “Yes, I’m still here”라며 우울하게 대답했다.

바텐더 루이스도 있었다. 내가 매니저에게 이력서를 주는 걸 보고 루이스는 내가 술을 훔치다 걸려서 잘린 직원이라고 농담을 했다. 매니저는 지금은 자리가 없지만 이력서는 받아 두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사케는 틀린 것 같아 무거운 마음으로 나와 사우스뱅크를 걸었다. 루이스가 한 농담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사케를 나가기 며칠 전 나는 창고에서 술을 하나 훔친 적이 있었다. ‘캄파리'라는 이름의 주홍빛 술이었다.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캄파리에 오렌지 주스나 소다를 섞어 마시곤 했는데 그 형광색의 음료가 그렇게 맛있어 보여서 술맛도 모르는 주제에 가방에 슬쩍한 것이었다. 식당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있다는 건 어렴풋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모든 구석구석을 다 감시하고 있으리라곤 믿지 않았다. 본사에서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허풍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술을 훔치던 걸 진짜로 봤다면? 그래서 엔다가 알게 됐다면? 그럼 나는 내 발로 나오지 않아도 해고당할 신세였을까? 내가 사케를 그만뒀을 때 사람들은 내가 잘렸다고 생각했을까? 루이스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겨우 찾은 일자리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쇼야'라는 일식당이었다. 호주에서 일을 구했을 때의 기쁨은 어디에도 견줄 데가 없는 것이었다. 남은 돈을 탈탈 털어가며 끼니를 겨우 이어가는 신세에서 갑자기 수입원이 생기면 그저 백만장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쇼야엔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좌식 자리가 있었는데 트라이얼 때 신었던 구두는 신고 벗기가 너무 불편해서 새 신을 사기로 했다. 아직 첫 급여도 받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들떠 있었다. 가게 직원이 어떤 종류의 신발을 찾느냐고 물었다. 나는 새 직장에서 신을 것이라 했다.

“Oh, congratulations! What is your work?” 직원이 물었다.

‘It’s a Japanese restaurant.” 자부심 가득히 내가 답했다.

쇼야는 3층으로 돼 있었다. 그래서 호되게 힘들었다. 그릇을 들고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신발을 신고 벗는 것도 진이 빠졌다. 시급은 현금으로 15불 정도였다. 매니저는 내가 원하는 만큼 근무시간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게 처음엔 횡재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일식당 '쇼야'가 있던 차이나타운

쇼야를 나오고 ‘세븐'이라는 나이트클럽에서도 연락이 왔다. 일명 ‘버스 보이'를 채용하고 있었다. 빈 병과 잔을 회수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등 허드렛일을 하는 직책이었다. 면접을 보기 위해 대낮에 찾아간 클럽은 알코올과 맥주 쉰내가 가득했고 바닥은 찐득거렸다. 2층으로 된 꽤 큰 클럽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동양인들만 모이는 ‘아시안 나이트'를 연다고 했다.

첫 일을 나간 날은 검은색 폴로티를 유니폼으로 제공받았는데 이는 내 급여에서 깎였다. 밤 11시에 출근이라고 해서 갔더니만 일은 바로 시작하는 게 아녔다. 버스 보이들은 바 옆에 서서 매니저가 일을 시작하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클럽에 사람이 많아지면 그제야 한 명씩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새로 들어온 나는 가장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서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물론 시급에 포함되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춤을 추기까지 했다. 어쨌든 음악은 터져 나왔고 분위기는 흥겨워서 거기 휩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이 시작되면 나는 미어터지는 클럽을 돌아다니며 잔과 병들을 수거했다. 깨진 유리도 몇 번씩 치워야 했다. 일은 매니저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했다. 바쁘지 않은 밤이면 2, 3 시정도에 일을 마쳤다. 그러면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겨우 몇 시간 일하고 텍시 비를 내면 남는 돈은 얼마 없었다. 클럽이 마감하는 시간까지 일하는 날이면 마감 청소를 해야 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클럽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며칠을 일하고 새 일정표를 받아 보았을 때 내 이름은 없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그게 끝이었다.


구직활동을 계속됐고 이번엔 태국 식당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라이건 스트리트 Lygon Street는 멜버른의 작은 이탈리아 같은 거리였고 그 입구 즈음에 있는 ‘레몬그라스'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 수년 간 멜버른 최고의 태국 식당으로 꼽혔다며 큼지막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지만 사업은 기울어 가는 게 분명했다. 주인은 언제나 몽롱해 보이는 동남아인 아저씨였다. 항상 비틀거리듯 움직였고 성질은 고약했다. 직원들에게 잔소리와 욕을 쉴 새 없이 퍼붓는 사람이었다. 긴장과 공포에 짓눌려 모두가 숨 한 번 편히 쉬지 못할 정도였다. 그 밑에서 이틀을 일했다. 사흘 째 나갔을 때 그의 학대가 조금도 잦아들지 않자 나는 그만두겠다고 했다.

“You wasted my time.” 사장이 말했다. 돈 한 푼 못 받는 처지에 누가 할 소린가 싶었지만 나는 아무 대꾸하지 못하고 나왔다.

대신 식당 리뷰를 남겼다. 폭정과도 같은 레몬그라스의 운영을 폭로하며 이곳에 가는 사람은 이에 편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글을 썼다. 글 마지막엔 사장을 향해 이렇게 썼다. “Michael, you will die alone and your funeral will be poorly attended.”


곧 카페 일이 생겼다. 내가 살던 동네 풋츠크레이 Footscray 근처엔 하이포인트라는 큰 쇼핑몰이 있었고, 그 안에 카페 드가니 Cafe Degani라는 곳에 이력서를 냈다가 주인을 만난 것이었다. 바로 트라이얼 날짜가 잡혔다. 카페 드가니는 멜버른에서 종종 보이는 체인이었다. 내가 간 곳은 크리스라는 그리스계 30대 남자가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에는 가끔 나이 지긋하신 그리스 어르신들이 놀러 오곤 했다. 크리스 부모님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크리스를 ‘크리스토퍼'라고 불렀다.

내가 할 일은 음식을 나르고 테이블을 치우는 것이었다. 주문은 카운터를 담당하는 여직원들이 받았다. 내겐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일이 쉬우면 시급이 적거나 주인이 말썽이었다. 카페 시급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였다. 크리스가 문제였다. 드가니의 크리스는 레몬그라스의 마이클을 뛰어넘을 정도로 분노조절장애가 의심되는 사람이었다. 일을 시작하자마자 크리스의 본색이 드러났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모양이었다. 바닥 물걸레질도, 야외 테이블을 들여오는 것도 자기와 똑같은 식으로 하지 않으면 짜증을 냈다.

아르바이트가 한두 번이 아니라 이런 대우는 익숙했다. 어딜 가든 똑같았다. 선임은 새 사람이 들어오면 눈 깜빡이는 횟수까지 지적질하는 법이었다. 알아서 일할 줄 아는 사람들을 원한다고 하지만 알아서 하면 왜 마음대로 하냐고 성화였다. 그렇다고 물어보면 그런 것도 모르냐고 바보 취급이었다.

드가니의 직원들은 크리스가 익숙한 모양이었다.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떠났고 끝까지 남은 자들이 크리스의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크리스는 손님들과 쌈박질도 잘했다. 한 커플이 음식이 안 나온다며 내게 확인을 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주방에 갔더니 주문지를 지나쳤다고 했다. 돌아가 손님에게 사과하고 음식은 이제 만들어지는 중이라고 했다. 얼마간 기다리던 커플은 음식을 취소해달라고 했다. 주방으로 갔더니 크리스는 이제 막 나오고 있다며 자기가 직접 내어가겠다고 했다. 커플은 음식을 거부했지만 크리스는 막무가내로 음식을 내려놓고 왔다. 이어서 나오는 다른 음식마저 나를 시켜 보냈다. 커플은 나를 돌려보냈다. 돌아오는 나를 보고 크리스는 다시 커플에게 가 억지로 음식을 떠밀었다. 커플도 지지 않고 맞섰다. 두 남자들 사이에 목소리가 커지더니 급기야는 달려들 기세가 되어 싸우기 시작했다. 이를 본 쇼핑몰 직원이 무전기로 경비를 호출했다. 잠시 상황이 정리가 되나 싶더니 남자 손님이 카운터에 와 다시 시비를 걸었다. 둘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자 카페 직원들과 경비가 달려들어 이들을 말렸다. 일을 시작한 첫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직원들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딘가 내가 한몫을 한 것 같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크리스의 마음에 들어야 했다. 그래야 이 일에 정착할 수 있었다. 크리스만 아니면 즐겁고 열심히 일할 자신이 있었다. 돈도 많이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는 마초 중의 마초였다. 나와는 상극의 인간이었다. 크리스는 기분이 좋으면 살갑게 구는 듯싶다가도 금방 막말을 했다. 두 번 같은 말하게 하지 말라며 내 자존심을 짓밟았고 잠깐 서서 쉬고 있기라도 하면 놀면서 돈 받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드가니에서 일주일 정도를 일했을 때였다. 새로 들어온 직원과 같이 서빙을 하게 됐다. 한 손님이 나를 부르더니 이 직원에게 당근 케이크를 시켰는데 나오지 않는다며 확인을 해달라고 했다. 직원 여자애는 바나나 케이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내가 당근 케이크를 꺼내 가져갔다. 손님은 크림을 추가로 시켰다고 했다. 직원 여자애에게 말했더니 크림을 어떻게 준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게 다였다. 손님이 찾는데 어떡할 거냐고 했더니 그냥 모르겠다는 말뿐이었다. 크림 갖다 주는 게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일일까 싶어 케이크에 크림을 올려 내어 갔다. 손님은 그걸 다른 접시에 따로 달라고 했다. 이미 크림이 묻은 케이크를 다시 쓸 수가 없어서 새 걸 꺼내야 했다. 그걸 크리스가 본 것이었다.

욕을 퍼붓는 크리스도, 멍청한 신입 여자애도, 크림이 올려 나오든 따로 나오든 웬만하면 처먹지 싶은 손님도 짜증이 났다. 

크리스에게 오는 주말은 쉬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학교 개강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여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탁을 하자마자 크리스는 일정표에서 바로 내 이름을 지웠다. 그리고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카페에 나오라고 했다. 그 말에 걱정이 돼서 밤에 잠까지 설칠 정도였다. 다음 날 가게에 갔더니 크리스는 퍽 친근한 태도를 보이며 자리에 앉으라 했다. 그동안 같이 일해보니 자기 가게엔 안 맞는 것 같다며 봉투를 내밀었다. 연금은 어쩌고 하며 떼지 않았다는 말과 내가 열심히 하는 건 알겠지만 다른 데서 더 좋은 기회를 얻길 바란다는 말로 나를 내보냈다. 나쁜 뜻은 없다며 에둘러하는 말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Your English is not so good”이었다.

돈을 받고 가게를 나왔다. 집에 가는 길에 방금의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떠올렸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를 보던 직원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내 영어는 “Not so good”이었다. 해고의 충격이 적지 않아 마음이 자꾸 내려앉았지만 곧 괜찮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 더 속만 상하기 전에 나온 게 다행이었다. 일단 급여는 받았으니 당장의 돈 걱정은 없었고 다른 일을 찾으면 됐다.

이전 05화 사케를 나오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