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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Aug 15. 2022

내 친구 세바스찬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로 세바스찬을 알게 되었다.

카페 드가니도 아픈 상처로 남았지만 거기서 일한 덕에 나는 예상치 못한 우정을 만들었다. 바리스타로 일하던 세바스찬이라는 친구였다. 그와 같이 가게 마감을 하고 퇴근을 한 날이 있었다. 같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얘기를 조금 나누게 됐다. 세바스찬 역시 빅토리아 대를 다닌다고 했다. 독일에서 건너와 비즈니스 석사를 공부하는 친구였다. 독일에서는 펩시와 로레알에서 마케팅 인턴을 한 경력이 있었는데 얼마 전 빅토리아 대 학생회에서 파트타임 마케팅 직원으로 채용이 됐다고 했다. 덕분에 드가니를 나오게 된 것이었다.

어느 날 세바스찬에게서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다. 학생회에서 마케팅 캠페인을 꾸미고 있는데 영상을 만들어 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와 퇴근하던 날 나는 한국에서 연극 영화를 공부했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내 포트폴리오를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포트폴리오 같은 걸 가진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대학교 때 한 것이라곤 연극 몇 개 만들어 올리고 단편영화 몇 편을 찍은 게 다였다. 단편영화를 가지고 포트폴리오라고 하기엔 마케팅 영상과 성격이 너무 달랐다. 나는 기술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다. 카메라 한 번 만져 본 적이 없는 연극영화과 학생이었다. 그러나 나는 뭐라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학교에서 만들었던 영화 하나를 인터넷 어딘가에서 찾아냈다. 내가 배우로 출연한 작품이었다. 연극영화과에 다녔단 증거일 뿐 세바스찬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웃음만 사지 않았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세바스찬은 내게 일을 맡겼다. 편집은 조금 할 줄 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자기가 찍어놓은 영상이 있으니 그걸로 뭔가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학교 부활절 축제 때 찍은 것이었다. (호주에서 부활절은 공휴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중요한 날이었다) 완성된 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싶다고 했다. 그걸 하나 만들어 주고 나니 세바스찬은 내게 일을 더 맡기기 시작했다. 학생회가 기획하는 크고 작은 축제들이 꽤 있었고 세바스찬은 페이스북 활성화를 위해 뭐라도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렇게 세바스찬이 찍은 허접스러운 영상과 내 허접스러운 편집물이 페이스북에 게시가 됐다.

학생회가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리더십 워크숍이었다. 학생들에게 며칠간 워크숍을 제공하고 정식 수료증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학교에 홍보가 잘 돼있지 않다고 여겨 세바스찬이 캠페인에 나선 것이었다. 세바스찬은 과거 워크숍 수료자들을 모아 인터뷰 영상을 찍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촬영과 편집의 임무가 내게 주어졌다.

촬영 날짜를 잡고 몇 주가 지나 당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까지도 세바스찬에게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취소가 된 줄로만 알았다. 막판까지도 아무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으니 촬영은 흐지부지가 됐다고 생각했다. 촬영은 결국 하지 않는 것이냐고 나는 세바스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예정대로 진행 중이란 답이 왔다. 다만 자기는 수업이 있어서 가지 못한다고 했다. 다른 스태프들에게 브리핑을 해놓았으니 알아서 할 거라고 했다. 토요일에 수업이 있다는 게 영 말이 되지 않았다.

부랴부랴 학교에 갔다. 워크숍 운영자 리즈가 졸업생들과 기다리고 있었다. 리즈는 학생회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이었다. 세바스찬 없이 이들을 만나자 겁부터 났다. 이제부터의 진행은 나에게 달린 것이었다. 이들은 일찍 만나 브런치를 먹고 있었다. 저들끼리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촬영을 기다린다기보다 동창회를 여는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 리즈가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계획은 있느냐고.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해야 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고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허겁지겁 사무실에 가서 카메라를 찾았다. 구식 캠코더였다. 마이크와 삼각대도 챙겼다. 모두가 주말을 희생해 모인 자리였다. 뭐라도 찍어서 만들어야 했다. 인터뷰 촬영을 시작했다. 나는 카메라 다루는 법이라곤 그저 전원을 켜고 빨간 버튼 누르는 것만 알았다. 마이크는 작동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게 카메라 내장 마이크로 녹음이 됐다. (그나마 소리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이마저 녹음되지 않았다면 나는 망신 감에 죽었을 수도 있었다.) 카메라 구도도, 장소도, 인터뷰 기술도 몰랐다. 조명도 밝은 곳이 무조건 좋은 줄 알고 복도의 형광등이나 대낮의 직사광선에 사람을 세우고 촬영했다.

졸업생들도 카메라 앞에서 진땀을 흘렸다. 내가 이 워크숍이라는 것에 조금이라도 아는 게 있어야 질문을 할 수도 있었다. 결국 저들끼리 할 말을 생각해내서 카메라에 대고 떠들기 시작했다. 이때는 몰랐다. 카메라를 향해 무턱대고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누군가 카메라 옆에 서서 질문을 던져 이야기를 끌어내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걸 편집으로 잘라내어 혼자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 카메라 경험 한 번 없는 이들에게 다짜고짜 홍보를 하라고 하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도 모르고, 그들도 몰랐다. 그래서 다 같이 억지로 했다. 혼이 쏙 빠지는 몇 시간의 촬영을 마쳤다. 찍은 영상을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화질도, 음질도 엉망이었다. 그러나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편집을 하고 나니 어딘가에 올릴 수준은 됐다. 완성된 영상들은 세바스찬을 통해 페이스북에 게시가 됐다. 어쩌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력과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영상을 써야만 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세바스찬은 가장 중요한 날 나타나질 않았다. 정말 토요일에 수업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 있다 내 연락을 받고 거짓말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죄책감을 모면하기 위해 괜찮은 영상이라고 애써 자신과 주변을 납득하며 어쩔 수 없이 올릴 것인지도 몰랐다.




학생회 사무실의 세바스찬.

세바스찬은 교내 외국인 학생회 International Students Association에서도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며 임원을 꾸릴 때가 되자 세바스찬은 회장에 출마했고 가뿐하게 당선이 됐다.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고 각종 행사에서도 지도자의 자질을 보이며 이미 자리를 굳혀가고 있던 터였다. 세바스찬은 외국인 학생회 행사에 나를 초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일하느라 바쁘고 나 혼자 시간 보내는 게 좋아서 학교 수업도 모임도 나는 귀찮게만 여겼다. 그러다 한두 번 자리에 나타났더니 그 후로는 나를 알아봐 주고 반가워해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외국인 학생회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베트남,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양인 학생들이었다. 서양에서 온 백인 학생들은 외국인 학생회에 관심이 없었다. 세바스찬은 드문 사례였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사람들은 같은 백인이라는 점, 영어를 쓴다는 점 덕에 호주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따로 모임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이들을 찾아 뭉쳐야 했다. 심지어는 호주에서 나고 자란 동양계 호주 학생들조차 외국인 학생회에 들어왔다.

서양 국가에서 공부하는 동양인들은 왜 동양인들끼리만 어울리냐는 말을 곧잘 듣는다. 서양에 왔으면 서양의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해야지 고국에서 하던 대로 똑같이 하면 무슨 소용이냐는 비판이다. 문제는 호주를 비롯한 서양의 사회에선 백인이 아닌 사람들은 외부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호주가 모국인 사람들조차 백인의 생김새가 아니면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받으며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호주 주류사회가 그렇게 인종을 갖고 울타리를 치니 동양인들은 저들끼리 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김새와 문화가 비슷해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점도 있지만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로서 갖는 연대감도 있었다.

“Where are you from?”이라는 물음은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말 중 하나라고 배웠지만 호주의 이런 인종의 문제를 생각하고 나니 마냥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백인들은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억양이 강해 호주 사람이 아닌 게 확실할 때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백인이 아닌 인종들은 “Where are you from?”을 곧잘 듣는다. 일단은 여기 사람이 아니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멜버른이다, 시드니다, 대답을 하면 그렇게 알아듣는 사람도 있지만 거기다 “Where are you really from?”이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까지 다른 인종의 다름을 규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학교 오리엔테이션 가이드에 소개된 호주 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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